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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시골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을 갔으나 갑작스러운 할아버지 사망으로 집안이 기울었다. 아버지의 어깨에 8명의 동생과 홀로 된 할머니까지 있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직장을 얻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모두 일본으로 부르셨다.  
 
그때부터 가장으로 가족과 동생을 돌보며 20여년을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셨다.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다는 할머니의 간청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이미 결혼한 동생들과 대가족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때가 해방 이듬해였다.  
 
귀국한 지 4년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집과 재산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그 후부터 아버지의 고생은 시작됐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밑천 한 푼 없어 난전 장사밖에 못할 처지였지만 장사는 부끄러워 못 하겠고, 힘든 일은 해본 적이 없어 힘이 부쳤다. 겨우 취직한 것이 시청 사무직이었다. 당시 공무원의 월급은 박봉 중의 박봉이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두 살 터울인 남매가 고등학교에 다녀 학비 대기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물질이 풍족하지 못한 대신 자식 남매를 기르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겨울에는 몸이 약한 어머니보다 먼저 일어나 큰 솥에 물을 데워 놓고 나를 깨우셨다. 아궁이 불을 화로에 담아 방 안에 들여놓고 우리 운동화를 데워, 따뜻한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상 한 번 차려 드리지 못했다. 세월은 자꾸 흘러 이제는 아버지보다 더 나이 많은 노년의 할머니가 됐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어린 딸이 되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사랑합니다. 생전에 한 번도 못한 고백을 지금 합니다. 

노영자·풋힐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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