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마침내, 일제히 꽃이 되었다
마침내, 일제히 꽃이 되었다바람에 일렁이던 들풀은 마침내 일제히 꽃을 피웠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뜬 순간, 짧은 그 순간
바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향기 같은 절정이 들판에 하얀 눈처럼 번졌다
들꽃은 송이송이 번지는 물보라 환희
몸 속 가득 작은 입자가 탄산수처럼 피어오른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빨래처럼 몸을 비틀어서라도
불꽃에 마른 장작 타 오르는 그 순간
안으로 안으로 다짐할수록 몽롱해 정신을 놓았다
주인은 태초부터 이 곳에 없었다
희미한 것들은 먼 곳에서 바람 되어 불고
거울 보듯 가까와진 세포가 꽃을 피우며 일어설 때
틀에 갇힌 통념을 깨고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호두알을 깨무는 일처럼 벌써 온몸이 지끈거렸다
지친 하루, 저물어 가는 어둠은 익숙해져 오고
어둠은 거침없이 바로 온몸을 눌러 온다
손가락 마디마다 튀어나온 굳은 살만큼 불거진 피로
노송의 깊은 껍질, 깊게 페인 한숨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순간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간이란 정의를 잃어버린 후
마침내 일제히 꽃이 보이듯 네가 보였다
오래 그 곳에 노송처럼 세월을 외면하며 서있는
너를 만지듯 꽃을 만지는 내내 바람은 춤을 추었다
꽃을 담은 수정체 속에 파란 하늘이 보이고,
바람이 일렁이고, 멀리 뒤돌아 가는 노을 언저리
지친 하루가 허리를 구부정히 지나가고 있었다
흩어져있던 시간의 조각들이 두 필로 목을 감싸고
부르르 몸을 터는 더듬이가 긴 곤충의 느린 시간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들꽃
무수한 언어의 유희에 맞춰 언덕이 모로 눕고
마침내 일제히 내속에서 너는 꽃이 되었다
하루가 깨어나고, 다시 저물어간다. 무거운 짐을 지고 종일 걸었던 삶의 무게가 어깨를 누른다. 꽃들도 눕고 싶을까? 온종일 꼿꼿이 서 있으려면 스르르 눈도 감기고 다리도 풀릴 텐데. 아마도 꽃을 피웠던 시간의 조각들을 모아 또 한 송이의 꽃을 피우려 안간힘을 다했으리라.
바람에 출렁이는 들풀은 마침내, 일제히 꽃을 피웠다. 내속에 들어와 만개한 들꽃은 놀랍게도 그리운 이의 얼굴이 되었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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