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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영혼이 담긴 대통령의 말

예영준 논설위원
“국가 지도자의 말에는 자신의 지문이 박힌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 사람은 고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하면서 한 조언이었는데, 한국식 화법으로 옮기면 ‘영혼이 담긴 말’쯤 되지 않을까 싶다. 불행히도 달변가였던 한두 명을 제외하면 한국 역대 대통령의 발언은 지문이 새겨진 육성보다 A4 용지에 나열된 영혼 없는 모범답안에 가까웠다. 그런 전례에 비춰볼 때 출근길 집무실 현관을 막아선 기자들과 즉석 문답(도어스테핑)을 주고받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호평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취임 한 달여 만에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어제 아침까지 13차례 이뤄졌다. 주말을 빼면 하는 날이 건너뛰는 날보다 더 많다는 의미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야당의 국회법 개정안 추진, 김건희 여사 봉하마을행, 북한 방사포 발사 후 영화관람 지적 등과 관한 취재진 질의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현관 앞 즉석 문답이 아무리 간단해 보여도 준비는 간단치 않은 법이다. 취임 직전의 윤 대통령이 오랜 지인과 식사하며 조언을 청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지인이 “아무리 바빠도 아침마다 보수, 진보 양쪽의 신문 사설을 정독하면 민심 파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자 윤 대통령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신문 사설 쓰기를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이 얘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과 함께 무거운 책임을 느낀 기억이 선명한데, 윤 대통령은 허물없는 지인에게 그런 조언을 구할 때부터 출근길 도어스테핑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어스테핑은 속성상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핵심만 추려 간결 명료하게 대답해야 한다. 미사여구로 포장할 필요도 없고 알 듯 말 듯 한 복선을 깔 여지도 없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윤 대통령의 스타일에 잘 들어맞는 방식이란 생각도 든다. 그 덕분에 국민은 대통령의 머릿속 생각을 보다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성과다. 그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도어스테핑에는 곳곳에 지뢰밭이 있다. 아무리 순발력 뛰어난 사람이라도 즉석 문답에서 나온 말에는 리스크가 있다. 윤 대통령의 답변도 몇 차례 구설에 올랐다. 정부 고위직의 검사 출신 인선 비율이 높다는 지적에 “미국 같은 나라를 보면 ‘거버먼트 어토니’(정부 변호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다. 그게 법치국가 아니겠나”고 한 것은 평소 소신에 따른 답변일 것이다. 미국의 거번먼트 어토니를 한국의 검사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범위를 넓혀 잡더라도 법률가가 고위 공직에 많이 진출할수록 법치주의에 충실하다고 한 인식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법률가의 지배와 동일시하는 말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할 정부 고위직을 법률 전문가들이 독과점하다 보면 법의 지배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변질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음주운전 경력으로 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직무적합성을 의심받고 있는 후보자를 두둔하는 것으로 비친 발언도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답변이었다. 도어스테핑이란 마운드에 올라선 투수 윤석열은 평소 스타일대로 돌직구를 던지고 있지만 몇몇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듯하다.
이런 문제적 발언은 도어스테핑이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수 있다. 때로는 대통령의 말실수를 기다리는 반대 진영에 좋은 먹잇감이 되는 발언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소통의 과정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행여 대통령의 발언이 일으킨 파장을 핑계로 슬그머니 도어스테핑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조율되고 정제된 말이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는 국민과 대통령의 소통에 있다. 국민은 대통령의 지문이 새겨진 발언, 영혼이 담긴 육성에 목말라한다.



예영준(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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