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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아버지의 유산

김현예 도쿄 특파원
태어난 곳은 일본 미에(三重)현, 자란 곳은 도쿄(東京)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진 요코하마(横浜)다. 위로는 오빠가 셋, 아래로는 여동생 넷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태어나, 지금껏 영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름은 박수남. 일본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다큐멘터리 ‘침묵’을 찍은 그 감독이다.

올해 87세,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로 이동해야 한다. 시력도 좋지 않아, 딸 박마의(54)씨가 분신처럼 어디든 동행한다. 그가 가는 곳엔 일본 극우단체들이 종종 따라다닌다. 집 주변에도 그를 감시하는 듯한 극우단체 회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런 불편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새 영화 이야기를 한참 했다.

재일동포 2세인 박수남 감독(가운데)은 일본 종군위안부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침묵’(2018년)으로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현예 특파원
구순을 바라보는 박 감독에게서 나오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지난 3일 요코하마에서 만난 그는 느리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있는 또렷한 한국말로 ‘아버지 유산’ 얘기를 했다.

박 감독 부친의 고향은 경북 의성이다. 부친은 일본으로 건너와 건축 하청업을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인 함바를 짓기도 했는데, 자연스레 일자리 때문에 그를 찾아오는 동포들이 많았다. 구두를 보고, 손님의 살림살이를 가늠하곤 했는데, 아버지를 찾아오는 조선인 손님들은 모두 구두가 낡아 형편이 없었다. 해방 후, 부친을 찾는 이들은 탄광이나 군수공장에 끌려와 일한 강제징용공이나 원폭 피해자가 많았다. 사정이 딱한 이들에게 아버지는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벗어 내주곤 했다.

아버지는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그에게 공부를 시켰다. 일본에서 피땀 흘려 일으킨 사업으로 번 돈은 딸인 박 감독의 영화 제작 밑천이 됐다. 돈 안 되는 영화를 찍는다고 반대할 법했지만 “우리나라의 통일과 동포를 위한 큰일을 위한 것이라면 가치 있다. 돈은 그렇게 쓰는 것”이라며 재산을 내줬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문제,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어떤 이들은 박 감독을 손가락질하기도 한다고 했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 언제까지 지난 역사를 끌어안고 한(恨) 이야기를 할 거냐는 타박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명(使命)이라는 거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일본에도, 한국에도 미래가 있다”는 얘기를 연거푸 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한 달이 돼간다. 냉골이었던 한·일관계를 새롭게 하자고 한다. 일본도 기대감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노령의 감독이 일생을 바쳐 하고 있는 이야기를 새 정부가 꼭 기억하길 바란다.



김현예(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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