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조·미 수호조약과 한미 방위조약
1953년 미국과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ce Treaty)’에 대해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40년 전 조선이 역사상 최초로 서양의 국가와 상호 ‘수호조약’을 맺었고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1882년 5월 22일 오전, 제물포항에 미국 측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해군 제독의 거대한 함선 ‘타이콘데로가’호와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의 막료 마건충 일행이 탄 중국 군함이 입항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절, 조선 정부의 전권대사 신헌과 부사 김홍집은 중국 측 함선에 올라 중국 황제 쪽을 향해 ‘삼배구고두례’(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를 시행했다.
중국 대표는 조선은 중국의 속국임으로 중국 함선에서 중국 대표의 참석하에 조약을 체결해야 된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측 슈펠트 제독은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약 당사자만 조약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미국 함선에서 조선과 미국 간에 상호 ‘수호통상조약(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S.- Korea)’이 체결됐다. 조선이 개국한 지 490년 되는 때였다.
그런데 조선은 당시 자진해서 독립국 자격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의 강자인 이홍장 북양대신의 주선과 압력에 따른 것이다. 이홍장 북양대신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막고,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계속하려면, 구미의 강대국을 조선반도에 끌어들여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때 조·미간에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어느 정도 ‘우호적’이며 조선의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제1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만일 (조선이) 어떤 나라로부터 부당하게 강제적 일을 당했을 경우 (미국은) 이에 개입, 두 편의 중간에서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과의) 우호성을 보인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정부는 강대국인 미국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하고도 그것을 국가 발전이나 국익을 위해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여전히 무기력해진 중국이나 또는 전혀 도움이 못 되는 러시아에 붙으려고만 했다.
미국은 조약 제2조에 있는 대로 전권대사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했고, 주한 미국 공사관을 개설했다. 하지만 조선은 조약이 체결된 지 1년 2개월 후에야 겨우 ‘보빙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미국에 보냈다.
만일 그때 조선 정부가 강대국 미국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한 다음, 일본이 ‘함포외교’ 이후 미국과 했던 것 정도로 실속 있는 후속 조치를 취해 나가고, 미국 후원하에 국방력을 강화했다면 그 후 조선은 개혁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침략을 당하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 왕국으로 대우하며 높은 수준의 수호조약을 맺기는 했으나 당시 관리들의 부정부패, 자치능력 결여, 빈곤, 백성 착취 등으로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며 조선과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나라는 다시 그 실수를 재현한다”고 했다.
미국과의 철통 같은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국가 방위에서 우선순위임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역사적 교훈을 140년 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조약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택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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