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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좋은 의도의 정치

의도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 정부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국민에게 주는 고별사나 취임사나, 좋은 의도로 가득하다. 그러나 의도란 무엇인가. 의도는 결과를 지향하지만 아직 결과에 이르지 않은 마음 상태다. 따라서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혹은 낳았으리라는 법은 없다.

잘하겠다고 들면 잘 되던가? 꼭 그렇지 않다. 현실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옷을 맵시 있게 입으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맵시가 없어지는 역설이 있다. 섹시해지겠다는 의도가 강할수록 안 섹시해지는 역설이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매력남 구 씨도 아니면서, 마구 벗어부친다고 섹시해지겠는가? 성적 유혹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일이 상대를 매혹할 수 있을까? 차라리 금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더 섹시하다. 저 금욕의 빗장을 풀어 보고 싶다, 저 빗장이 풀렸을 때 저 사람이 어떻게 돌아버릴까, 이런 상상을 촉발할 수 있으니까.
선한 의도 과신, 자신감 충만하면
권력 쥐면 과감하게 권력 행사해
역설 인식 못하면 ‘정치적 유아’
딜레마와 대결할 정치인 기대해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종합 격투기 경기도 마찬가지다. 마구 치고받는 선수들의 야수성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엄청난 폭력배가 흉기를 들고 야수처럼 길가에서 날뛴다면 사람들은 열광은커녕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종합 격투기 경기에 매료되는 것은 가공할 폭력을 가진 이들이 엄격한 규칙이 통제하는 링 안에서 낑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성이 통제하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마찬가지 이유로 예술작품에서 작가의 의도에 집착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신비평 이론가들이 오래전에 그런 경향을 신나게 두들겨 팬 바 있다. 비평이론가 윌리엄 윔서트와 먼로 비어즐리의 논문 “의도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가 출간된 것이 벌써 7, 80년 전이다. 소설가 권여선은 “소설을 쓸 때 경계하는 것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적이 있다. “제 의도대로 쓰는 것을 경계해요. 제 계획이나 구상 그대로, 의도를 거의 배반하지 않는 글쓰기, 그건 실패, 완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언어가 언제나 저를 이겨주기를 바라면서 씁니다.” 미술 작품인들 다르랴. 사람들은 의도가 훌륭한 졸작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걸작을 보기 원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요즘 대학생들의 윤리 의식이 부족하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교수들이 외치는 거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윤리 수업을 필수로 만들자! 착한 인간 양성 수업을 들어야만 졸업할 수 있게 하자! 그러면, 학생들이 윤리적이 될 것 같은가? 대학 내 직업 윤리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그 수업을 마지못해 들었다고 퍽이나 윤리적이 되겠다. 천년의 발정이, 아니 천년의 윤리의식마저 식을 것 같다.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일까. 이 사회의 사과문은 대개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제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런 결과를 빚어서 죄송합니다” 혹은 “제 의도와는 달리 만약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야 비로소 의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니 절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세용~. 의도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책임으로부터 다 면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고 말았다면, 그것은 의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방만한 평소 습관이나 태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습관이나 태도 때문이 아니라면, 해당 사회의 ‘언어’를 숙지하지 못해 생긴 잘못일 수도 있다. 거래처 여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사소한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자기에게 “꼬리를 쳤다”고 망언을 해서는 안된다. 그 여직원의 친절은 그 직업에서 통용되는 언어이지 의도가 아닐 것이다. 매력적인 여자 후배가 “선배, 맛있는 거 한번 같이 먹어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이건 나에게 반했다는 뜻일까. 아닐걸. 공짜밥 정도는 먹어주겠어, 정도의 뜻이 아닐까. 청자뿐 아니라 화자도 용례를 잘 파악해야 한다. 표현은 개판으로 해 놓고, 상대가 화를 내면 “아니 제 의도는 그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해봐야 별 소용 없다. 잘못된 표현을 즉시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적인 차원에서 가시적인 것은 본인도 알 듯 말 듯 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해당 사회에 통용되는 표현이다. 의도는 불투명한 병 안에 담긴 물이요, 결과는 엎질러진 물이다.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쉬울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의 의도가 나빴다고 서둘러 넘겨짚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찾을 수 없는 의도를 넘겨짚거나, 갖다 붙이는 일에 유의해야 한다.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나쁜 놈은 아닐 수 있으므로. 그러니 의도를 단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악행을 저지르려고 의도한 자보다 실제 저지른 자가 더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상대의 의도를 넘겨짚고, 오해에 근거해서 단죄하려 들겠지.

정치란 그럴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려 드는 일이다. 그게 쉬울 리야. 선한 의도든 악한 의도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정한 결과를 불러오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단, 의도하는 거 자체가 각별한 일이다. 의도는 매우 특수한 활동이 아니던가. 음식이 위에서 대장으로 가도록 의도하나? 심장이 뛰도록 의도하나? 숨 쉬려고 매 순간 의도하나? 힘들어서 못 할 것이다. 사람들은 되도록 대충 살고 싶어하지 않나. 의도는 체력과 의지력이 있는 사람이 가까스로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사업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경우, 의도는 사후적으로 발생한다. 교과서에 실린 글의 의도를 묻는 문제가 수학능력시험에 나왔다고 해보자. 정답은 “돈 벌기 위한 의도로 썼다”일까, 아니면,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의도로 썼다”일까. 그것도 아니면 “역사에 남기 위한 의도로 썼다”일까. 사실, 저자는 별생각 없이 그 글을 썼을 수도 있고, 나라도 발전시키고 역사에도 남고 돈도 벌기 위한 복합적인 의도를 가지고 썼을 수도 있다. 누가 그 의도를 명백히 알 것인가. 쓴 사람 본인이라고 분명히 알까. 의도란, 종종 사후 해석을 통해 비로소 확정되곤 한다.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무엇인가 명확한 마음의 지향을 가지는 것만 해도 체력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니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의도를 현실에서 관철하는 일은 더 대단하다. 현실은 복잡성과 딜레마와 역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외로워서 연애를 했더니 더 외로워지는 역설, 배가 나와도 배는 여전히 고프다는 역설. 포기했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되더라는 역설. 미래를 예측한다며 약을 파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삶이 정녕 법칙과 예측대로 흘러가던가. 모르겠다. 대체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빔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지 않던가. 그러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죽을 때다.

이른바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통제 불능의 상황 속에서 어떻든 결과를 만들어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영문도 모른 채, 신의 의도도 모른 채, 하루하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지만은 않겠다는 결기를 가졌을 사람들이다. 선한 의도와 경직된 계획만으로는 그런 역동적이고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과 상상력과 유연성과 탄성이 필요하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념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언제는 책임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히 가려서 지시할 수 없다.” 성숙한 정치인은 자기 의도대로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단정하지 않고, 상황 속에 있는 내적 동학까지 감지한다. 어떻게 하면 그 동학과 함께 할 것이며, 그 동학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인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 현실의 아이러니를 인식하지 못하고, 선한 의도에만 집착하는 정치인을 일러 “정치적 유아”라고 부른 적이 있다. 막대한 화재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큰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여줄 것인가의 문제는 결정할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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