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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에스터의 깍두기

“오늘 같이  
지쳐있을 때  
눈 감으면  
조용히 찾아오는  
감동의  
기억들이 있다”
 
내 주위에는 ‘에스터’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 나를 무척 따르고 좋아하는 에스터는 친구가 아니고 내 친구의 딸 이름이다. 그 딸 하나, 아들 하나 둔 친구는 요리 솜씨가 좋아 주말 모임은 으레 그 집에서 열었다.  


 
오래전 그때 나는 앓고 있었다. SAT시험 준비에 바쁠 터인데 딸 에스터는 나를 위해 굴까지 넣고 담근 깍두기 한 병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 딸이 없는 나는 부럽기도 했고 기특해 가슴이 뭉클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의 지시 없이 솔선해서 만든 그 깍두기는 열 오른 몸과 머리를 깨끗이 해주어 나는 쾌차되었다.
 
그 후 일상의 빠른 물살 속을 헤엄치며 나는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다. 친구는 남편의 미국회사 한국 사무소장으로 서울로 주거지를 옮겼다. 영어권의 에스터가 서울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친구와 에스터 그리고 서울 이사로 자연스레 깍두기의 고마움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어디서나 깍두기를 만나면 에스터의 깍두기가 생각났고 에스터는 어느 대학으로 진학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흘러간 아름다운 옛날 추억으로 가끔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동하기를 잘하는 내 가슴을 주체 못할 때가 많다. 습작기간 내면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가 탈고의 순간에 솟아나는 기쁨이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넘쳐오는 희열이 그렇다. 촉각이 민감하게 날을 세운다. 열린 감성과 합세하여 박수치며 반응한다. 움츠러드는 내 감성이 요즈음 글쟁이가 이래도 되나 싶은 바로 메마른 이때에 문득 에스터의 깍두기 추억이 되살아났다. 에스터가 그리워졌다.
 
오늘 같이 지쳐있을 때 눈 감으면 조용히 찾아오는 감동의 기억들이 있다. 바로 에스터의 깍두기도 그렇다.  
 
스위스 사는 조카를 방문했을 때 레만호수의 미풍과 그 맑은 분수 물살, 또 장엄한 융프라우가 가슴 아리도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남가주 팔로스버디스 언덕에서 겨울 바다 위로 붉게 숨어드는 일몰을 지켜보면서 집안 가득 채우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연주곡은 늘 눈물 글썽이게 감동의 경지로 나를 몰고 간다.  
 
젊은 한 사람이 그것도 잘 나가던 사람이 신의 사랑을 설파하는데 그토록 진지할 수 있을까? 심혈을 다 쏟을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영혼구원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전문적인 지식과 학벌 그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선교에 헌신한 이용규 교수의 ‘내려놓음’은 문필로서 진리를 끌어내어 영혼을 빛의 세계로 안내해주었다. 완벽하게 진실을 엮었기에 문학성이 놀라웠다. 몽골을 한국을, 온 인류를 울리는데 그의 진실은 관통하고 만 것이다.
 
감동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아름다움과 진실 앞에 더 없이 맑게 핀다.  어둠을 몰아내는 반짝이는 별로 뜬다.
 
‘에스터’를 깊이 알고 싶어졌다. 구약의 에스터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에스터서’를 읽으며 맴돌았다. 나를 감동시킨 에스터의 깍뚜기 에피소드는 나에게 성서라는 냇가로 가는 지도를 펼쳐주었다. 에스터와 더 가까워지도록 차표 역할을 한 셈이다.
 
원래 ‘에스터’는 별이란 뜻으로 구약성서 가운데 룻기와 더불어 유일하게 여자 이름을 주제로 삼았다. ‘에스터’란 미모의 한 유대여인이 페르시아 황후로 선택된다. 관찰해 보면 ‘에스터서’에는 교리도 신학도 없으며 율법이나 죄에 대한 말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여러 가지 인과응보 사실들이 있어 우리들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에스터 4:16)  에스터의 목숨을 건 결단 대사가 가슴을 파고든다.
 
에스터는 나를 반성으로 몰고 간다. ‘에스터서’는 조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애족 애국심을 고취시켜주는 역할에 큰 몫을 한다. 조국 분단의 아픔, 혈육 이별의 슬픔마저 잊고, 물질이 모든 면에서 척도가 되는 풍조에 젖어있는가. 베를린 장벽은 과거였다. 분단국가의 아픔, 기아선상의 많은 북한 어린이 굶주림은 현재다. 38선만큼이나 슬프다. 아프다. 비극이다.
 
에스터는 슬기롭다. 결단성과 용기의 여인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21세기에 적합한 여인상이다. 맡겨진 중대한 과업을 침착하고 재치 있게 성취해 나간다. 역사의 물줄기 흐름을 바꾸어 놓은 성서 속 어제의 에스터, 오늘 같이 난세에 우리 주변을 어둠에서 빛으로 삶의 방향을 옮겨 놓는데 꼭 필요하다. 구원 역사는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 딸 에스터야 말로 좋은 예다. 어딜 가든지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피스 메이커’이다. 정성 다해 담근 깍두기로 아픈 이웃을 위로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야 말로 바로 작은 의미의 애국 애족이 아닌가. 크고 작은 무 한 조각 두 조각 개체로 존재하다가 사랑이란 양념으로 잘 버무려져 ‘나는 죽고 너 깍두기 하나의 큰  맛’이 되는 의미는 믿음과 화목과 희생의 기적이란 감동을 안겨주었다. 또 다른 목적과 그 성취, 동참한 숨은 에스터의 헌신이 그랬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 역시 미세한 지체’로서 존재의식 깨달음을 주었다. 새로운 눈뜸이었다.
 
가슴에 일던 모래 바람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깍두기 처방으로 내 병을 낫게 한 여고생 에스터는 두 자녀의 엄마별이 되어 지금 남가주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김영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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