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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잡아먹은 부모 비극…러 약탈에 우크라 덮친 90년전 악몽

우크라이나에서 예상 외의 저항에 직면한 러시아가 곡물을 수탈하는 ‘약탈 전쟁’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빼앗아 내다 팔거나 자국용으로 쓰고 대신 우크라이나에선 식량을 바닥 내 반러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이다. 우크라이나는 과거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일으켰던 '대기근'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기억이 있다.

1억 달러 넘는 곡물 50만t 약탈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지난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농부들에게서 불법적으로 압수한 곡물을 처분하려는 러시아 행동을 강력히 규탄한다" "러시아 점령자들이 곡물을 훔쳐 국제 시장에 판매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이는 식량 약탈"이라고 비판했다. 외무부는 "러시아가 수출하는 곡물은 (우크라이나에서) 약탈한 곡물이 포함돼 있을 수 있다. 이를 사려는 모든 국가는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농부가 지난달 16일 수도 키이우 인근에서 파종을 준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1억 달러(1290억원)가 넘는 곡물 40만~50만t을 압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내에 곡물 양이 아직 많아 압수량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사상 최다인 1억600만t 곡물을 수확했다. 올봄에 남부 지역 항구를 통해 그중 60%를 수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말 전쟁 발발 후 러시아군이 흑해와 아조우해를 봉쇄하면서 수출이 어려워졌고, 창고에 곡물 2000만t을 보관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헤르손·자포리자·루한스크·도네츠크 지역에는 150만t이 저장돼 있었다. 아직 약 100만t이 남아있다고 한다. 니콜라이 솔스키 우크라이나 농업정책부 장관은 "곡물 약탈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점령지에 있는 곡물들을 전부 가져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 점령 당국은 곡물을 가져갈 수 있는 법령까지 만들었다. 지난 7일 자포리자 지역 베르단스크 시청에선 '개인 소유의 밀과 보리 압수에 관한 명령'을, 지난달 27일에는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크라스노야르스크 의회 농업정책위원회가 헤르손 지역 농부들로부터 농작물을 몰수하기로 결정했다.

채소도 쓸어가 병합 지역서 싸게 공급

러시아가 가져간 곡물들은 Z 표지(러시아군 의미)가 있는 트럭에 실려 러시아가 2014년에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 남부의 세바스토폴 항구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이 항구에서 떠나는 거의 모든 러시아 선박이 우크라이나 곡물을 가져갔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탈취된 곡물을 실은 선박은 지중해에 있다. 시리아가 목적지일 가능성이 크다. 그곳에서 다시 다른 중동 국가들에 공급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이집트 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 탈취된 곡식을 실은 2척의 러시아 선박을 되돌려보냈다.

지난 4월 말 러시아 합병지역인 크림반도 남부 얄타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점령한 헤르손 지역에서 재배한 채소가 값싸게 판매되고 있다. 크림반도 당국 캡처
곡물뿐만이 아니다. 갓 재배한 채소도 쓸어가고 있다. 르피가로는 "헤르손 지역의 채소는 크림반도로 실려 가고 매우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 이후 농산물 가격이 오르자 크림반도 당국이 인접한 헤르손 지역에서 채소를 압수해 가져온 것이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는 엘레나 엘렉첸 크림반도 산업정책장관 대행을 인용해 우크라이나에서 거의 300t을 가져왔다고 전했다. 엘렉첸 장관은 당당하게 "이 채소는 싸게 공급되고 있다. 양배추는 1㎏당 48루블(900원), 감자는 1㎏당 50루블(950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최근 물가가 상승하면서 한국에선 감자가 1㎏당 4000원이 넘었다.

러시아는 값비싼 농기계까지 빼앗아가고 있다. CNN은 "러시아군이 멜리토폴시에서 대당 30만 달러(약 3억 7000만원)짜리 콤바인수확기 등 총 500만 달러(약 63억원)에 달하는 농기계 장비를 훔쳐갔다"고 보도했다.

‘파종 거부하면 참수’ 협박

곡물과 채소를 빼앗아가도 우크라이나인들은 막을 수가 없다. 러시아군의 폭력과 위협 때문이다. 자포리자 지역 농민인 로만 우마로프는 미국의 소리(VOA)에 "러시아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내 머리에 총을 겨누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악명이 높은 체첸 민병대는 지난 4월 헤르손 지역의 헤니체스크에 와서 농장의 재산을 전부 차지한 뒤 파종을 거부할 경우 참수한다고 협박했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 인근 지역의 곡물 창고가 미사일을 맞아 화재가 났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국
점령지 인근 혹은 교전 지역에선 러시아군이 농장과 곡물 저장고에 겨냥해 미사일과 포탄을 쏘고 있다. 점령된 자포리자와 가까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는 이달 초 곡물창고에 미사일이 날아와 쑥대밭이 됐다. 격전지인 루한스크주 루베즈노예의 있는 3만t 곡물 저장소도 러시아군 공격으로 파괴됐다. 심지어 곡식을 심은 밭에 지뢰를 심어놓는 짓도 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젤렌스키 "러 굶주림 목표 삼아"

1932년 대기근 당시 굵주림으로 인해 바짝 마른 우크라이나 아이들. 홀로도모르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은 이제 우크라이나 국민이 굶주림에 빠지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1932~33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홀로도모르'를 연상케 한다고 전했다. 홀로도모르는 '기아로 인한 대량살인'(mass killing by hunger)이라는 의미다.

당시 스탈린 정권의 가혹한 수탈로 대기근이 발생해 많게는 10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당시 식인 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2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인에게 대기근은 트라우마가 됐다. 90년이 지나 이제 러시아가 식량을 약탈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또 다른 대기근이 올까 걱정하고 있다.




박소영(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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