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백목련은 피고 지고
가족이 함께 모이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특별한 행사날에는 요리학 전공에 레이쳘레이쇼에서 수석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출연하던 둘째 딸이 총대를 맨다. 고급 레스트랑에서나 맛보는 갖가지 음식들을 요리책에 나오는 사진처럼 후딱 만들어낸다. 나는 몇가지 음식을 장만해도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밀가루로 얼굴에 분화장을 하는데 딸은 별로 힘 안들이고 척척 만들어낸다.
딸은 뉴스앵커의 꿈을 안고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숟가락 거꾸로 들고 아나운서 흉내를 냈다. 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당당하고 거침없던 딸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죄송하지만 2년 더 컬러너리스쿨 학비를 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동안 타주 사립대학에 아들 딸 둘 등록금 대느라 개미허리가 됐다. 겨우 허리 펴고 내 인생 살까 했는데 무슨 청천벼락! 가까스로 진정하고 틴에이저 키우며 부모지침서에서 익힌대로 ‘왜(Why)’라고 이유 안 따지고 ‘어떻게(HOW)’라고 해결책을 물었다. 지난해 졸업한 선배들 중에 앵커는 커녕 방송국에 취직한 선배조차 드문 상황이고 동양인 외모로 앵커가 되기 힘들다고 딸이 하소연했다. 푸드네트워크 쪽은 기회가 있다는 판단이다. 심란했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 달라고 했다가 금방 전화해서 결정했다. 대학시절 대강 공부하던 딸이 그때부터 학업에 올인, 수석으로 졸업하고 푸드네트워크 인턴에 합격했다.
부모를 제일 기쁘게 하는 일은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일이다. 티격티격 싸우면 부모 가슴 미어진다. 딸은 뉴저지, 아들은 샌디에이고에 사는데 동부와 서부의 끝을 오가며 알콩달콩 지낸다. 재택 근무가 가능해 일년에 여러달 뭉쳐 사는데 손주 넷이 어울려 노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애들이 다니러 와서 일주일만 지나면 나는 혼이 빠지는데 두집 식구는 한두달씩 어울려 같이 산다.
요리 잘하면 어디가던 대접 받는다. 딸은 어디서나 인기 짱. 나 닮아(?) 몸 안 도사리고 실력을 발휘한다. 먹는 데는 왕중왕인 아들은 누나 요리 먹으며 사는 게 꿈, 요리에 별로인 며느리도 대환영이다. 여우와 곰은 궁합이 잘 맞는다. 우리집은 딸은 여우고 며느리는 곰이다. 여우가 재주 부린 음식을 착한 곰은 잘도 먹는다.
이맘 때면 어머니 방 앞 뜰에 아름드리 자란 백목련이 흐드러진 잎을 휘날렸다. 잎도 안 돋아난 나무에 매달린 목련꽃잎이 청승맞아 새집 조경하며 목련을 안 심었다. 어머니날 선물 뭐 필요하느냐고 아들 딸이 물어왔다. 나이 들면 버릴 것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다. 꽃 보내지 말고 새 집에 목련을 심자고 했다.
잘려서 병에 담긴 꽃들은 삼일만 지나면 병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 어머니날 애들이 보낸 돈으로 앞 뜰에 백목련 한 그루 심었다. ‘할머니 나무’라고 패를 단다.
‘떠난 뒤 서글픈 겨울은 갔습니다. (중략) 마른 잎김을 띄우며 줍는 소녀야. 뜰 아래 향기가 옷에 젖는다.’ -이기희 ‘백목련’ 중에서.
전국 고등학교생 백일장에서 고 김춘수 시인이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시다. 내가 두 살 되던 해 홀로 되신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복을 입으셨다. 세월 따라 목련은 피고 지고 어머니 사랑은 천년의 향기로 남는다.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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