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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그대 그리고 나 - 해(Sun) 바라기

언제부터인지 아내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가 코를 고는 것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내가 눈을 뜨는 순간에 아내가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 깊고 단잠을 자느라 아내의 코 고는 소리에 귀를 열어줄 여유가 없어서인지 자는 동안에는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아내가 코를 곤다고 하더라도 잠시 기다리면 다시 잠잠해지므로 아내의 코골이는 각방을 써야 하는 절박감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었다. 코 고는 문제는 나보다는 아내 자신의 자존심에 더 큰 상처가 되는 것 같았다. 남에게 쉽게 꺼내 보일 수 없는 수치스러운 상처와 같은 것이 바로 코골이였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밤이었을 것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 밤에서 월요일 새벽으로 넘어가는 언저리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고막이 겨울날 북풍에 문풍지처럼 떨리는 것 같았다. 마침 일요일 오후에 20km 가까이 뛰었던 터라 나의 고단함은 애써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무시하게 하였다. 아내의 코 고는 소리는 한 번 더 이어졌고 나는 다시 놀랐다가 곧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코 고는 소리의 그 우렁참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내 기억 속에 강하게 새겨졌던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내에게 전날 밤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씩씩하고 위풍당당했던 지에 대해 웃음기를 섞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저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의 크기로 말을 했는데 아내는 물대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 아내는 내게 자리를 바꾸어 자자고 제안을 했다. 그 전에는 어떻게 잤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 집에 이사 온 뒤로는 내가 왼쪽에서, 아내가 오른쪽에서 잠을 잔다. 온종일 코를 골지 않는 방법에 대해 무지하게 열심히 공부한 모양이었다. 아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왼쪽을 향해 모로 누워서 자면 코를 훨씬 덜 곤다는 것인데, 원래 내 자리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앞에 거칠 것이 없으니 그만큼 숨을 쉬는 게 용이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딱히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으로 증명이 된 방법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러면 어쩌랴. 아내가 시키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집의 법도이거늘. 나는 그날부터 자리를 옮겨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도, 또 그다음 날 아침에도 내가 눈을 뜨면 아내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려 자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원조 해바라기이다. 내 이름이 김학선인데 발음을 하면 김학썬(Sun)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옛날부터 닉네임으로 ‘SUN’을 사용해왔다.
 
코 고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자는 자리를 바꾼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아내는 평생 나(Sun)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운명인 것을.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요즈음 “봄 날씨가 어째 겨울보다 더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아내를 위해 먼저 자리에 들어 바뀌기 전의 내 자리에 눕는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올 때 나는 슬그머니 내 자리로 돌아간다. 이불을 들치고 몸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으며 아내는 “아, 따뜻해(SUN)”라고 속삭이며 행복한 잠을 청한다. 평생 해바라기로 살아온 아내를 위해 해처럼 몸이 따뜻한 내가 아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가 고작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래도 그 따뜻함을 한 겹 더 덮고 아내가 달콤한 잠을 잘 수 있다면 코 고는 소리가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린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5월 초순이 지난 밤인데도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김학선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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