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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세 번째 쓰는 육아일기

‘배가 고팠나 보다. 볼이 터지라 젖을 빨던 아가가 그 힘든 일을 멈추고 빠안히 올려다 본다. 작은 눈동자. 그러나 깊고 맑은 호수 속에 내가 들어있다. 오늘은 이렇게 아가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내 아이 육아일기는 다분히 감상적이고 잔뜩 멋이 들어 갔었다. 이다음 아이가 크면, 내가 얼마나 정성 들여 키웠는지 보여주어야지 하는 과시욕도 없었다. 그저 첫아이 육아일기쯤은 써야지 멋진 엄마가 되지 않을까 하는 허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덕분에 육아가 멋으로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려 보았던 아기와 함께 지내는 환상이 깨지면서 겪었던 일들은 가슴 철렁 내려앉는 놀람과 기쁨의 반복이었고, 인간의 오감 칠정을 모두 느끼게 한 순간순간들이었다.
 
‘정오쯤 응가를 했다. 오후 4시쯤 분유 12oz 먹었다. 엄마 젖을 짜서 냉장고에 넣어둔 것은 한 시간 후에 줘야겠다. 간식처럼.’
 
손자를 돌보며 썼던 두 번째 육아일기는 다소 사무적이고 보고 형식이다. 낮 동안 나와 함께 지낸 아기의 상태를 되도록 자세히 적어 퇴근 후 아기와 지낼 아들 내외에게 도움을 줄 요량이었다.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치-익 혈압계에 압축공기가 들어가는 소리로 아침이 시작된다. 어제는 정상이었는데 오늘은 약간 높은 수치다. 좀 더 세심한 주의를 해야겠다.’
 
세 번째 쓰는 육아일기 노트엔 온통 숫자뿐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혈압숫자. 맥박수. 복용하는 약들. 예닐곱 개가 되는 약을 먹어야 하는 시간. 눈뜨자마자 빈 속에 먹는 약. 식후에 먹는 약. 각각 다르다. 환자에게 주어야 할 약을 깜박 잊은 때가 종종 있어서 꼼꼼하게 시간을 기록한다. 24시간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다. 봄철이라 사방엔 꽃들이 만발한데 내 달력엔 병원 방문, 의사 방문으로 붉은색 마크가 만발해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썼던 육아일기가 한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의 기록이라면 세 번째 쓰는 육아(환자)일기는 생성되었던 생명체가 소멸하여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지난해 늦가을, 남편은 가슴을 열고 네 가지 심장수술을 받았다. 그중엔 꺼져가는 심장을 살린다는 ‘관상동맥 우회술’도 포함되어 있어서 꺼질 뻔한 생명은 살렸지만 10시간 가까운 긴 수술은 가만히 놔두어도 늙어가며 망가질 몸을 한꺼번에 망가뜨렸다.
 
멀쩡하게 잘 걷고, 산에도 오르던 다리가 한순간 무너졌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워커에 의지해서 힘겹게 발을 떼어 놓는다. 아기들이 워커에 의지해 걷기 시작하면 대견하고 기뻐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 측은한 마음이 기쁨을 가로막는다.
 
생명의 생성 과정은 신비하고 경이롭다. 소멸의 과정도 그와 비슷하다. 다만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왜냐하면, 내 생명의 소멸도 그와 같을 테니까.
 
그 소멸로 가는 과정이 더 힘들지 않고,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무너진 모습이라도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 길었으면 한다.

최근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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