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믿지 못할 정치인들의 말
한국의 도움을 호소하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연설이 한국국회에서 열렸는데, 국회의원들의 참석도 저조하고 반응도 썰렁했다는 뉴스를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심정이 복잡하기도 했다.러시아의 침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택한 무기(?)는 ‘말’이었다. 절실한 진정성이 담긴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감동을 불러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미국, 일본, 유엔 등의 연설회에는 의원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연설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유독 한국 국회에서는 반응이 차가웠다는 것이다. 한 일간지는 사설을 통해 국격(國格)을 떨어트리는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비판했다. (중앙일보 4월13일자 사설)
“우리 국회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300명의 의원 중 60명 정도만 참석해 곳곳에 빈자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심지어 휴대폰을 하거나 딴짓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연설이 끝난 뒤 반응 또한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국회의원이 누구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말 하나는 잘 한다고 뻐기는 분들 아닌가? 그 이들의 또 다른 의무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 전쟁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위협 아래 놓여 있는 분단국가 아닌가?
그런 정치가들의 말을 믿어야 하는, 믿으려 애써야 하는 국민들이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말이란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애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말의 힘이 막강하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경우가 많다. 말로 국민을 설득하고, 감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말이다’라는 명언도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매우 위험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국민만 보고 가겠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멋진 말씀이다. 희망의 새 시대가 활짝 열릴 것만 같다. 꼭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국민? 어떤 국민?
이렇게 반문하면 말문이 탁 막히고 만다. 대체 어느 국민의 뜻에 따르고, 어떤 국민을 보고 가겠다는 말씀인가? 국민의 성향은 실로 다양하고, 저마다 생각이나 처한 상황도 다르다. 실제로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국민이 절반을 넘는다. 정치가들의 말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이 끄덕이는 말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라 해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승자는 무조건 절대적으로 옳고, 패자는 완전히 그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人)의 말(言)이 곧 믿음(信)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걸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지금처럼 말의 가치가 형편 없이 떨어지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의 힘을 믿어야 한다. 믿을 수밖에 없다. 진심 어린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국민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변화시키고, 전 세계 지도자들을 숙연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막강한 힘을 발휘한 명언이 많다.
그런 명언들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경청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 나오는… 그래서 인간의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인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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