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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약탈자 돌변…순찰대 만들어 지켜내"

빚더미 앉았다 재기한 영 김 아이리스USA 대표
20대 옷가게 차렸다 망해
포기하고 떠났다가 '유턴'
상처·분노가 한인 재건 동력
경제규모 맞게 정치력 키워야

4·29 폭동으로 30만 달러 빚더미에 앉았던 청년 영 김은 30년 후 연 매출 1억 달러 이상인 중견 의류업체 대표로 거듭났다. 김상진 기자

4·29 폭동으로 30만 달러 빚더미에 앉았던 청년 영 김은 30년 후 연 매출 1억 달러 이상인 중견 의류업체 대표로 거듭났다. 김상진 기자

버논에서 연 매출 1억 달러 이상인 의류업체 아이리스USA를 운영하는 영 김 대표. LA에서 내로라하는 의류업체 대표로 성공했지만 그 밑거름은 역설적이게도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폭동이다. 이민자로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렸던 그 뼈아팠던 상처가 지금의 김 대표를 만들었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난 30년 노력의 결실은 고진감래.
 
LA다운타운에 있는 경찰본부 앞에서 흑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LA시 도서관 제공]

LA다운타운에 있는 경찰본부 앞에서 흑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LA시 도서관 제공]

 
의류업계 줄줄이 무너져
 
20대 청년 영 김이 꿈을 안고 미국 정착을 시작한 1980년대 LA다운타운 패션디스트릭(자바시장)은 한인 의류업계 생태계가 막 형성될 때였다. “다운타운 빌딩 숲 건물 안 5층, 10층에 한인 봉제공장이 하나둘 들어섰고 한인이 운영하는 도매 옷가게도 늘어나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한 그 역시도 1988년 다운타운에 작은 옷가게를 개업해 조금씩 매출이 늘고 있었다.  
 
당시 한인 도매 옷가게의 주요 고객들은 ‘스왑밋’ 업소들이었다. 대부분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 장사하고 나중에 갚았다. 이런 구조로 인해 폭동으로 한인 스왑밋 가게들이 약탈당하고 불에 타자 한인 도매업소들도 도미노처럼 하루 아침에 함께 쓰러졌다.  


 
김 대표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김 대표는 “한인 옷가게 업주들의 전 재산은 가게에 있던 옷과 물품이 전부다. 멀쩡하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약탈과 방화로 잿더미가 된 업주들에게 외상값을 받을 방법이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폭동이 잠잠해진 그해 7월 계산해보니 빚만 30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폭동 직후 한 라틴계 주민이 방송 인터뷰에서 ‘TODAY IS FREE DAY!’라고 하더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때였다”고 덧붙였다.
 
자체 순찰대 구성해 방어
 
당시 한인 자바시장 구역은 동서로 메인-샌피드로 스트리트, 남북으로 올림픽-워싱턴 불러바드였다. 김 대표는 “폭동으로 서쪽에서 불길이 치솟자 나를 포함해 한인 옷가게 업주 100여 명이 모였다. 자체 순찰대를 구성했다”면서 “메인 스트리트를 저지선 삼아 시위대가 자바시장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경비했다. 봉제공장 업주들이 공장 밴을 제공해 순찰에 나섰다”고 다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김 대표는 “순찰 도중 시위대가 서쪽 지역 가게를 약탈했다. 거리에 있던 경찰에게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 물으니 지금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총을 쏘기도 했지만, 경찰은 지켜만 봤다”고 회고했다. 서부 개척시대에서나 볼법한 무법지대 세상이었다. 김 대표는 “경찰에 연락해도 도움이 안 됐다. 경찰은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 방어하라’고 말했다. 한인 자체 순찰대 일부가 총을 들었고 다 같이 자바시장을 지켰다”고 했다.
 
자체 순찰대 노력 덕분인지 한 인쇄업체가 불에 탄 것 외에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LA한인타운은 불바다가 됐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는 김 대표는 “아내가 LA한인타운 3가와 하버드 지역에 살았다. 걱정돼서 찾아갔더니 6가, 웨스턴 길에 약탈자들이 어마무시했다”고 말했다.
 
약탈자들은 ‘평범한 이웃 주민’이었다.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다 (물건을) 가져가는 데 나만 안 가져가면 손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찰이 막지도 않으니 약탈과 방화가 번졌다. ‘프리 데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뼈아픈 상처에 LA 떠나기도
 
스왑밋 가게 등 거래처가 망하자 3개월 뒤 김 대표도 가게를 폐업하고 빚더미에 앉았다. 허망함과 분노에 그는 막 결혼한 아내와 LA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시는 LA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 대표는 조지아주까지 차를 몰고 가다 운전대를 돌렸다. LA의 가능성마저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대표 표현대로 “와신상담”, 다시 시작했다. 폭동으로 피해를 본 수많은 1세대 한인들처럼 그도 다시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갖고 있던 돈을 끌어모아 다운타운에 다시 옷가게를 오픈했다.  
 
공동체 주인의식 꽃 피워야  
 
폭동 발생 후 30년. LA지역 의류 및 관련 무역업의 90% 이상은 한인이 장악하고 있다. 한인사회가 명실상부 LA 의류업계의 주류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30년 전 한인 자영업자 대부분 ‘LA 경제와 정치 시스템’을 알지못했다. 폭동 피해가 발생해도 보상이나 은행 대출 방법을 몰랐다. 미국이란 나라의 시스템을 모르니 주류사회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정치력 부재를 실감했다”며 “지금 의류업 등 한인 비즈니스 규모는 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1.5~2세 참여도 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정치력 신장으로 한인사회가 정치인들과 긴밀한 협력관계가 형성됐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역시 한인 정치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역 정치인의 기금모금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지역봉사와 후원도 꾸준히 했다. 특히 의류협회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돼 자바시장 업주들의 권익과 시장 보호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LA한인회 이사장으로서 한인 커뮤니티를 뒤에서 돕고 있다.
 
“한인사회 위상은 그냥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지 않고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하겠지’ 생각하는 순간 폭동의 아픔은 재발할 수 있습니다. 이민 선배들은 비즈니스를 키워가며 정치력 신장을 위한 노력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죠. ‘우리 말’을 미국사회 곳곳에 전달했고 그 목소리가 커져 한인사회 발언권이 생겼어요. 30년 전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유권자 등록과 투표’ 먼저 실천한다면 한인사회 발전을 더 공고히 할 수 있답니다.”

김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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