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마지막 세대
3월 마지막 주, 그레잇넥 사우스 미들스쿨에서 열린 손녀딸의 ‘Beauty And Beast’ 뮤지컬을 관람했다. 아이는 6학년이지만 큰 역할을 담당해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공연을 보면서 손자 세대가 도래했고, 나의 세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중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에 콩트로 가작 입선했다. 겨우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켜 지금도 느낌이 좋지 않다. 시대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가난을 물려주었고 나는 허둥지둥 미국으로 와 50년 가까이 이 땅에서 살아왔다. 생존을 위한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세 딸이 자라 엄마가 되었고, 손자가 넷이나 된다. 이제 그들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이민세대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겨우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 공부시킨 아버지, 실패한 작가, 인정받지 못한 시인으로 나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주변에 아픈 사람도 많은데 큰 병 없이 하루하루 지내 가족들 걱정 덜어주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해야겠다.
딸만 있는 집안의 할아버지는 어쩐지 모르게 ‘거북한 존재’로 보일 때가 많다. 아이들은 엄마와 가깝고, 딸들이 하는 영어를 빨리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잡담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혼자 내 방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생일이 많아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때는 대충 순서가 끝나면 일어난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다. 】〉〕그저 엉뚱한 말을 안 해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 나의 세대는 끝나가고 있구나. 푸른 청년의 꿈을 안고, 낯선 땅에서 시작된 나의 이민세대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머지않아 집에서 한국말을 하고, 아침마다 한국신문을 뒤적이는 나의 세대는 사라질 것이다. 집안의 된장 냄새, 김치를 좋아하는 나의 시간은 줄어들고 있을 것이다. 손자들은 무표정한 하지(손자들은 할아버지 발음을 못 해 하지로 불려왔다)를 크게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 아이 돌보는데 바쁜 딸들은 늙은 부모를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The Mountain Rats’는 영어로 쓴 나의 단편이다. 캐츠킬 폐가를 수리해 살다가 죽을 때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야생동물들에게 돌려주는 스토리다. 나는 마지막 몇 년을 혼자 떨어져 산속, 허물어져 가는 집에 살고 싶다. 집은 나와 함께 운명을 같이해도 된다. 전기가 들어오고 물만 있으면 된다. 지붕이 좀 새도, 깨진 유리창 사이로 새가 날아 들어와도 상관없다. 산길을 걷고 돌아와 밥을 끓여 먹고, 낮잠을 즐기고, 영감이 떠오르면 시나 에세이를 써서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고, 아쉬우면 이렇게 공유하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어디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어차피 기다리지 않는 그 날은 결국은 오고야 말 것이다.
내가 다니는 산책길 벤치에 흙이 잔뜩 묻어있는 윗도리가 있었다. 조금 더 걸었더니 모자가 나무에 걸려있고, 버려진 신발이 있었다. 이들을 한데 모아 산책로 주변에 웅덩이를 파고 묻었다. 모자는 머리, 신은 발, 윗도리는 심장, 한 생명을 기억했다.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누가 죽었는지 모르니까. 나의 이민 세대는 이렇게 사라져 거름이 될 것이다. 마지막 세대.
최복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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