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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부수는 폭도, 오지 않는 경찰에 좌절"

약탈 충격 딛고 대형 의류업체 성장…김보환 타이밍 회장
한인타운에서 치솟는 불길, 풀러턴에서도 환히 보여
원망보단 '측은지심' 들어.. 슬픈 얘기지만 성장 밑거름

30년 전 캄튼 의류 매장에서 약탈 피해를 본 김보환 회장은 현재 LA 한인 의류업계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타이밍’을 경영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30년 전 캄튼 의류 매장에서 약탈 피해를 본 김보환 회장은 현재 LA 한인 의류업계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타이밍’을 경영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의류업체 ‘타이밍’과 LA 한인타운의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을 소유한 김보환 회장은 30년 전 자신보다 더 큰 피해를 본 한인들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그래도 나는 먹고살 게 있었지만, 전부를 잃은 분들의 어려움과 상실감은 이루 말로 전하기 힘들다”고 했다.
 
당시 김 회장은 캄튼지역 주변에서 의류 소매업소를, LA다운타운의 자바시장에서는 도매업소를 운영했고 옥스포드 호텔은 오픈 직전이었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그 날’ 해 질 무렵, 눈앞에서 폭도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애지중지 키워온 캄튼 매장을 유린했던 순간을 회상할 때는 그조차 터지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폭도들이 상점을 부수고 약탈해가는 모습. [중앙포토]

폭도들이 상점을 부수고 약탈해가는 모습. [중앙포토]

 
힘들지만 꿈 키웠던 시절
 
1980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김 회장은 1984년 부인과 함께 창업한 캄튼 매장을 시작으로 의류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불혹을 한참 넘겨 전공인 화학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당시는 공부보다는 생계를 위해 부부가 함께 뛰어야 했다.


 
그는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며 “새벽 4시에 문을 여는 레스토랑 일로 시작해서 낮에는 헌팅턴 파크의 옷가게에서 일했지만 모두 합해서 월급 1000달러도 못 벌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학비며 생활비며 한국의 부모님들께 더는 손을 벌리기 싫어 부부는 창업을 결심했다. 영어도 자본도 사업수완도 부족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운칠기삼(운이 7할, 노력이 3할) 같은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김 회장은 “당시 톰 브래들리가 LA 시장이었는데 중요한 공적 중 하나가 시청 앞에 ‘캄튼타우니 센터’라는 캄튼 최초의 제대로 된 쇼핑몰을 만든 것”이라며 “20여개 입점 업체를 구한다는 소식에 크레딧도 없이 신청했는데 오히려 기존 크레딧이 없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되며 덜컥 승인됐다”고 회상했다.
 
가게 자리는 900스퀘어피트로 작았지만, 문을 열자마다 대박이 터졌다. 김 회장도 처음 6개월 정도만 돕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칠 정도였다. 바로 옆 신발 가게가 1년을 못 버티고 떠나자 두 가게를 터서 1800스퀘어피트로 매장을 늘렸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1만 스퀘어피트 매장에 맞먹는 매출을 올렸다”며 “쇼핑몰 안에 웰페어 오피스가 있어 지원금 체크가 지급되는 날을 기준으로 매달 1~5일, 15~20일은 크리스마스 대목 같았다”고 말했다.
 
조여 오는 폭동의 구름
 
당시 캄튼은 전체 인구의 95%가 흑인이었다. 캄튼에서는 총기 사고가 나도 상황이 끝난 뒤에 경찰이 도착한다는 괴담이 돌던 때다.  
 
김 회장이 입점한 쇼핑몰이 브래들리 시장의 공적으로 인정됐던 이유도 불안한 치안 때문에 어떤 개발업자, 어떤 앵커 테넌트도 캄튼 지역을 꺼리던 차에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폭동이 터졌다는 소식에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느껴졌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인들이 많이 운영하는 리커스토어, 그로서리 스토어, 스왑밋, 세탁소 등이 약탈당하고 전소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김 회장이 살던 풀러턴 집에서도 밤에 한인타운에서 치솟는 불길이 보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다.
 
당시 김 회장의 비즈니스는 탄력을 받아 캄튼, 헌팅턴 파크, 커다히 등 LA 남부 지역 3곳에서 소매 매장을 운영했고, 다운타운 자바시장에서는 도매업을 하고 있었으며, 옥스포드 호텔도 영업 개시 직전이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젊음을 바쳐 이룬 성과들이라 한층 위태로워 보였다.
 
눈앞에서 목격한 폭동
 
폭동 가운데도 김 회장의 캄튼 매장과 해당 쇼핑몰은 평소처럼 영업했다. 5월 2일. 자바시장 도매 매장을 떠나 캄튼 매장을 정리하러 도착한 김 회장 부부는 눈앞에서 폭도들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오후 6시 30분쯤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는데 흑인 40~50명이 쇼핑몰에 난입해서 유리창을 깨기 시작했다”며 “바로 옆 뷰티 서플라이 업소에 이어 우리 가게도 유리를 부수고 들어가서 진열된 옷을 무더기로 들고나오는 걸 봤다”고 전했다.
 
시큐리티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고 김 회장 부부도 위험을 직감하고 감히 막지 못했다. 캄튼 시청 앞 상징성 있는 쇼핑몰이고 경찰서와 소방서도 인접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들은 바로 쇼핑몰에 흑인 업주가 많아 폭도들이 습격을 미룬 게 그 정도였고 방화로 이어지지 않은 점은 다행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옥스포드 호텔도 위기를 겪었다. 김 회장은 “길 건너 여왕봉 다방이 있던 쇼핑몰도 폭동 시작 이후 2~3일 동안은 영업했다”며 “그러다 인근 로데오 갤러리아 쇼핑몰에서 폭도들을 향해 한인 업주들이 총을 발사하는 등 상황이 긴박해졌다”고 말했다.
 
인근 쇼핑몰들이 모래주머니를 쌓고 무장한 시큐리티를 배치했다. 호텔도 지하로 통하는 주차장 입구에 사람 키 높이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경비원이 상주했다. 특히 밤에는 빌딩의 모든 전원을 끄고 시선을 끌지 않도록 했는데 다행히 충돌이나 피해 없이 5월 중순경 주변이 정돈된 뒤 오픈할 수 있었다.
 
원망할 겨를 없이 영업 재개
 
캄튼 매장이 험한 꼴을 당하는 동안 김 회장 부부는 2시간가량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경찰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김 회장은 “‘할 수 있는 게 없구나’라는 생각뿐 많은 걸 포기한 상태로 멍하니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난다”며 “당시 캐딜락을 운전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아시안이 고급 차 몬다고 공격당할 수도 있던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폭도들은 동네 주민들로 평소 자주 찾는 쇼핑몰을 군중심리에 휩쓸려 우발적으로 넘어온 것으로 그는 이해했다. 이전에도 크고 작은 절도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겨냈는데 애정 어린 첫 가게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점에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폭도들이 휩쓸고 간 뒤 시큐리티가 쇼핑몰 전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부출입을 막았다. 가게는 거의 모든 물건이 사라져 10만 달러 정도의 피해를 남겼다. 다음날 다시 찾아가 나무판자로 깨진 유리창 부분을 막고 청소한 뒤 다시 영업을 재개하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다
 
김 회장은 캄튼 매장의 보험 클레임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부부 생각에 우리는 밥 먹고 살 거 있는데 그러지 말자고 했다”며 “지금 생각하면 보험료 낸 당연한 내 권리였지만 그때는 더 힘든 사람, 더 크게 당한 사람한테 양보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캄튼 매장은 그 후로도 7~8년을 더 운영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흑인 고객의 자리는 히스패닉이 채웠다.
 
김 회장은 폭동의 어려움을 딛고 대가족을 이뤘다. 동생들과 처가 식구들이 대거 LA로 옮겨와 의류업을 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해냈다.
 
그는 “3세까지 태어나 명절에 모이면 가족·친지가 100명을 넘는다”며 “LA 폭동은 이민 1세의 슬픈 스토리지만 교훈으로 삼아 한인사회가 나아갈 방향 제시에 활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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