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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는 길

밤 11시59분,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새 천년을 맞아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그 해 춘삼월 구례행 관광열차였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불현듯 그리워, 아버지 고향 마을인 하동을 무박 2일 여행으로 꽃놀이 겸 다녀오기로 했다. 꽃구경이라는 구실로 혼자 떠난 건 철들고 처음이었다.  
 
열차에 오르니 모두들 짝 지어 오거나 삼삼오오 단체 관광객이었다. 나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깜깜한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기차는 온밤을 달려 새벽 다섯시 구례에 도착했다. 밤새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입심으로 기차가 내달린 듯했다. 어둑어둑한 역 앞에 관광버스가 늘어서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번호와 맞는 버스를 찾아 옮겨 타고 섬진강을 따라 광양으로 들어섰다.    
 
새벽 안개에 싸인 섬진강변은 하얗게 피어난 매화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 고향 하동 땅이 지척이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그 곳이었다. 아침 식사 전 솔밭을 거닐었다. 잘 자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고운 백사장을 거닐며 오래전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어떤 꿈을 꾸셨을까. 도회지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 할아버지를 만나면 길 위에서도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노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매화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매실 장아찌 한 병 사서 배낭에 넣었다. 2000여 개 장독대가 인상적이었다. 기업으로 일군 매실 명인이 작은 거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길 건너엔 섬진강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고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건너편 강기슭 어디쯤 내가 좋아하는 수달들이 정답게 뛰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넉넉한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섬진강에서 머리 단을 푸는 걸까. 유유한 섬진강이 의젓했다. 거꾸로 잠긴 파란 하늘에 반짝이는 물결과 하얀 백사장을 보니 ‘엄마야 누나야’ 노래가 절로 나왔다.  
 


쌍계사 십리 벚꽃 길에 꽃비가 내렸다. 입구까지 걸어 들어가는데 그 사이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길동무도 생겼다. 탑전을 돌면서 그 해 전쟁 같은 큰 시험을 앞둔 남동생의 무운을 빌고 또 빌었다. 절을 내려오면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하는 나옹 화상의 시구가 그려진 찻잔 받침 한 세트를 꾸려 넣었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에 들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어서인지 노점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엿장수와 약장수를 기대했던가. 팔을 한껏 휘저으며 부르던 가수의 ‘화개장터’노래를 생각하며 슬며시 웃었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지상의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핀다는데 저리 일찍 떨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돌아오는 길에는 무언가 충만함이 있었다. 도시의 각박함으로 한껏 날이 서 있던 나의 모난 심사가 어느새 둥그스름하게 마모돼 부드럽게 변한 모양이었다. 벌써 20여년이 지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영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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