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책] ‘천천히 서두르라’
작은 거인, 침묵의 소리, 뜨거운 얼음… 이런 표현을 ‘형용모순(Oxymoron)’이라고 부른다. 상반된 어휘를 결합시켜 새로운 의미나 이미지를 빚어내는 수사법이다. 모순 어법 또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옥시모론이란 낱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날카로운 예리한 저능아, 즉 ‘똑똑한 바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 자체에 이미 모순이 드러나 있다.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형용모순은 우리 생활에서 뜻밖에 많이 쓰이고 있다. 문학 작품에도 즐겨 등장한다. 예를 들면 빛나는 어둠, 눈 뜬 장님, 산송장,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을 듣는 이등 많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나 “눈을 감아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는 말도 모순 어법이다.
정치판에 형용모순이 등장하면 위험하다. 보수적 진보, 진보적 보수 따위의 말장난은 속임수다.
종교에서도 형용모순은 널리 쓰인다. 일상에 대한 각성의 장치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부처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고 부처가 없으면 더 냉큼 지나가라. 가난하고 비통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형용모순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해 보이지만 깊이 생각하면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로, 일반적인 상식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과 사고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내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라는 말도 형용모순이다. 라틴어 명언인데,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친 가르침이라고 한다. 의미가 참 깊고 슬기로운 가르침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우리 속담과 같은 가르침인데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젊은 시절부터 좌우명으로 삼아온 “게으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라는 말과 “천천히 서두르라”라는 말을 기둥으로 삼으면 내 삶도 한결 든든해질 것 같다. 여기에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을 더하면 금상첨화가 되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송구스럽지만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 보면 지나치게 서두르는 바람에 망친 일이 너무도 많아 후회스럽다. 인생살이에서도 그랬고, 연극이나 글쓰기 같은 작업에서도 그랬다.
“천천히 서두르라”라는 말을 우리 생활에 적용시키면, ‘순발력과 지구력의 조화’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날에는 패기와 번뜩이는 순발력에 기대어 살 수 있지만 나이 들면 점점 어려워진다. 생각도 행동도 걸음도 느려진다. 그러니 끈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매사에 진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하지만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쉬엄쉬엄 차근차근 걷다 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서둘러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빨리 가야할 필요도 없다.
프리웨이를 달리다 보면, 뭐가 그리 급한지 요리조리 추월해가며 위험 운전하는 차를 자주 본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해도 그다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서두르더라도 천천히 서두르는 것이 슬기롭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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