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In] 사표가 아닌 무효표
이번 대선에서 30만 7542표가 소용없는 표였다. 윤석열 당선인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간 득표수 차이인 24만7077표 보다 6만465표나 더 많다.
역대 대선과 비교해도 많다. 무효표는 15대 40만 195표, 16대 22만 3047표, 17대 11만 9984표, 18대 12만 6838표, 19대 13만 5733표였다. 직전 대선인 19대와 비교하면 이번 20대 대선에서 2배가 넘는 무효표가 나왔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15대 대선에서 발생한 무효표 40만 195표 이후 25년 만에 가장 많다고 한다.
분석가들은 무효표가 많은 가장 큰 이유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와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선 후보가 각각 윤 당선인, 이 후보와 단일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퇴한 후보들의 이름이 9일 본투표의 투표지에 여전히 올라 있어서다.
재외선거에서도 무효표는 많았다. 이번 재외선거는 해외 115개국(177개 공관), 219개 투표소에서 실시됐다. 재외선거에 참여한 16만1000명중 1만3000여표가 무효표였다.
재외선거 무효표는 사실 무효가 될 표가 아니었다. 2월23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됐는데 당시는 안 후보나 김 후보가 사퇴하기 전이어서 두 사람을 찍은 표들이 모두 무효표로 처리됐다. 2009년 이후 도입된 재외선거 대선에서 후보 사퇴로 인한 무효표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신껏 찍은 내 표가 무효표가 됐다는 데 한인들의 허탈감은 컸다. 미국 중부에 사는 한 유권자는 "투표장에 가기 위해 16시간을 운전했는데 단일화 때문에 내 표가 무효표가 됐다"며 "안철수 찍으면 사표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먼길 마다하지 않고 가서 투표했는데 내가 지지한 후보가 내 표를 사표로 만든 셈"이라고 했다.
분통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외국민 투표 종료 이후 후보 사퇴를 제한하는 '안철수법' 제정해 주세요"라는 글로 표현됐다. 글의 작성자는 내 표를 무효표로 만든 후보와 제도를 꾸짖는다. "투표를 다 끝낸 이후의 후보 사퇴로 인한 강제 무효표 처리는 그 표를 던진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선례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다음 선거에도 재외국민 선거 진행 이후 급작스럽게 사퇴하는 경우가 생길 텐데 그렇게 되면 재외국민 투표자들이 안심하고 투표할 수 있겠는가"
재외선거에선 유효표가 무효 처리됐지만 본투표에서는 고의적인 사표들도 있었다. 일부러 무효표를 던진 한 유권자의 소감은 이렇다. "1번과 2번 사이 빈 공간에 도장을 찍었어요. 도저히 누굴 찍을 수가 없어서…"
"투표 용지에 아예 도장을 찍지 않았어요. 지난 5년간 민주당에 실망을 많이 해 정권이 바뀌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국민의힘도 쇄신했다는 느낌은 못 주는 것 같아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개표참관인이 놀란 장면들도 있다. 대전에서 개표사무원으로 개표 작업을 진행한 강모씨는 "한 후보의 이름을 긋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써 놓은 표도 있었다. 유권자가 '뽑을 사람이 없다'는 거부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0.73% 차이로 이기고 졌다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유권자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특정 후보를 찍은 유효표보다 무효표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번과 2번 사이에 찍은 도장, 아무도 찍지 못한 도장, 노 전 대통령의 이름 위에 찍힌 도장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유권자로서 권리와 의무인 투표는 하겠지만 차마 당신들은 뽑을 수 없다'는.
여야 모두 박빙 승부의 승패 원인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지역별, 세대별, 성별 표심을 읽으려고 고심한다. 해답은 일부러 던진 '사표'에서 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효표는 많았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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