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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이슬

간밤/ 보얀 버선 발로 유년시절을/ 딛고 온 당신은/ 차가운 아침의 기억이다.// 어느 새벽 내가 당신의 숨결을 만날 때/ 모든 것을 감추고 아득한 숲으로 사라지는/ 당신의 몸짓.
 
졸시 ‘이슬’입니다. 이슬은 순수합니다. 이슬은 정직합니다, 그리고 이슬은 순간이지만 반복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슬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 목요일은 퀸즈병원의 외래수술을 하는 날입니다. 자주 가는 병원이 아니어서 주차장에 발레파킹을 이용합니다. 키가 큰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아이티에서 온 듯한 30대 검은 피부색의 가브리엘은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음으로 달려 나와 차를 주차해주곤 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병원 모퉁이를 돌아서면, 가브리엘은 어느새 내 차를 운전하여 나오곤 했습니다. 마치 내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나 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유방 X선 사진을 이용한 유방조직 검사(stereotactic breast biopsy)를 마치고 가브리엘이 문 앞까지 운전해온 차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오피스로 돌아왔습니다. 가방을 열어 보니 휴대용 소형 카메라가 없어졌습니다. 가방은 항상 운전석 옆 좌석에 놓아두곤 했습니다. 카메라에는 지난 1~2년간의 많은 소중한 사진이 메모리에 간직돼 있었습니다. 지난해 귀국 때의 부모님 모습, 30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그리운 친구, 티 없는 어린 조카들, 수술 후 젊은 수련의·환자와 함께했던 사진, 몇 개의 조직 검사 표본들.  
 
한 달이 지난 후 목요일 수술이 있어 다시 가브리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백지에 편지를 써서 반으로 접은 후 가방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넣어두었습니다. “Dear Gabriel, Please return my camera, it has a disc with many sentimental memories, Gabriel,  I promise that I will buy you a brand-new camera.” 수술이 끝나고 오피스에 돌아왔습니다. 가방을 열어 보니 편지는 아침에 넣어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읽지 않은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가방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듯했습니다.  
 
시간은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을 잃은 것은 아무런 아쉬움도 주지 않고 매일의 일상처럼 그렇게 잊혔습니다. 삶 속에서 어떤 때는 잊지 않고 늘 가슴에 넣어두는 일도 있지만 물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주 잊게 됩니다. 어두운 밤을 지내고 새벽에 보는 이슬처럼 내가 사는 뉴욕에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춥고 긴 겨울이 아니었다면 화려하지 않은 작은 꽃들의 유희에 마음이 들뜨지 않았겠지요.  
 
일 년이 지난 후 어느 셋째 목요일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오른쪽 의자를 뒤로 빼려고 자동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의자 밑에서 들렸습니다. 오른쪽 의자 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아, 거기에는 일 년 전 잃었던 먼지 묻은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카메라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썼던 읽히지 않은 편지. 다시 나에게 돌아온 카메라, 그것은 반가움보다는 감동을 잃은 나의 일상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주차장을 떠나며 유난히 하얀 이를 보이며 손을 흔드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차의 뒷유리창에 어른거리었습니다.

성석제 / 외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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