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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검정 치마저고리

1987년의 겨울 어느 날, 검정 치마저고리 새 옷을 지어 입었을 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리고 있었다. 석양 무렵 그 옷을 입고 간 곳은 성 라자로 마을이었다. 저녁식사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한센인들이 모이는 식당 길목에 서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로 왔느냐”며 깜짝 놀라면서 반기는 그분들과 잠시 만나고 돌아왔다. 한센인들이야 내가 새 옷을 입고 온 것을 몰라보았지만, 그래도 새 옷 입은 설렘을 그분들 앞에서 풀었다.
 
내가 입는 옷은 유행에 뒤떨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치마저고리이다. 봄, 여름, 가을에는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겨울이면 모두 까맣게 입는다. 수도인의 본분에 맞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처지에 검정 치마저고리 몇 벌이면 한평생 충분하다.  
 
그런데도 새로 지어 입은 그 검정 치마저고리가 나를 그토록 설레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치성당에 다니는 테레사님으로부터 질 좋은 모직 검정 치마저고릿감과 그 옷을 지을 품삯까지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들은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될 때에 수단을 만들어 주려고 몇 년 동안 푼돈을 정성스럽게 모아 왔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의 수단을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성직자 옷으로 몫 지워 저축한 돈을 다른 일에 쓸 수가 없어서 나의 치마저고릿감을 마련했다고 했다. 무척 놀라워하는 나에게 그분은 제발 기쁜 마음으로 받아만 달라고 했다.
 
어찌 하필 원불교 교역자인 나의 검정 치마저고릿감을 마련할 생각을 했을까, 뜻밖에 천주교 신자로부터 받은 선물에 성스러움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아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75년 성 라자로 마을을 처음 방문한 후 한센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마음의 권속처럼 건사할 수 있도록 주위의 많은 분들이 따뜻한 온정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큰 뜻을 품고 귀국한 이경재 신부님이 성 라자로 마을의 새판을 짜면서 참으로 많은 집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건축비를 보태기 위해 엿장사를 시작했다.
 
테레사님은 내가 겨울철마다 팔고 있는 그 엿을 10년도 넘게 팔아 준 분이다. 그분은 토요일마다 아파트 단지 장마당에서 여러 수도원의 수녀들이 위탁한 물품을 판매했다. 성 라자로 마을은 천주교 복지시설이다.
 
타 종교인끼리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도우며 협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을 더욱 고맙게 여겼다. 테레사 님이 마련해 준 새 옷을 입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을 때 두 마음 없이 성 라자로마을 한센인들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가장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을 쉼 없이 주는 사람들이 바로 성 라자로 마을 한센인들이다. 그분들은 내 음성만 들려도 이 방 저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요?” 하며 웃는 얼굴로 맞아준다. 언젠가는 그렇게 말하는 그분들에게 두 달도 안 돼서 왔는데 뭐가 오랜만이냐고, 바른 계산이라도 대듯, 왔다 간 날짜를 밝혔다. 그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박 교무님 뵌 지가 반년도 더 된 것 같은데” 하면서 웃었다. 그러한 것을 따지고 있을 때의 그분들과 나의 모습은 서로가 행복했다.
 
어느 여름날 그분들을 찾아갔을 때, 한 노인이 방금 아들이 다녀갔다며 두유 한 병을 들고나와서 먹으라고 했다. 그것을 들고 서 있는 그분의 눈빛에는 간청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나는 한 병을 단숨에 마셨다. 그러자 그분은 얼른 또 한 병을 들고 와서 “목이 말랐구먼” 하며 더 마시라고 했다. 그만 마시겠다고 사양하자 그분은 꼭 어머니 같은 눈빛으로 서운해했다.  
 
오랜만에 성 라자로 마을에 갔을 때, 한 남자 한센인이 내 곁으로 다가와 “교무님 건강하세요? 오실 때가 되었는데도 안 오시면 우리들은 교무님이 어디가 아프신가 하고 걱정해요. 우리는 가족은 안 기다려도 교무님은 기다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한센인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테레사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 검정 치마저고리를 지금도 즐겨 입는다.

박청수 /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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