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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길 위에 길이 있다

이기희

이기희

고등학교 시절 노는 시간 틈만 나면 칠판에 인기 항목을 나열해 놓고 투표를 실시했다. ‘장래 꿈은? 직업은? 신랑감은 어떤 사람? ” 당시 여고생 인기 직업은 스튜어디스 나이팅게일간호사 수녀였다. 스튜어디스는 멋진 유니폼 입고 몸매 자랑하며 비행기 타고 세계를 누빈다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호감이 갔지만 몸매나 얼굴, 집안 사정이나 여러모로 불가능했다. 나는 그때까지 비행기 타보기는 커녕 고속버스도 타보지 못했다. 내 단짝이 소근거렸다. “스튜어디스 별 것 아냐. 비행기 차장이야”라는 말에 감복,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문제는 결혼 대상자 선호도 조사. 직업별로 의사 변호사 판검사 교수 사업가 등이 우선 순위로 간택(?) 됐는데 화가 소설가 시인 음악가는 없었다. “원하는 남편감은 어떤 사람이냐”라고 친구들이 닥달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가난뱅이 문인이나 안 팔리는 그림 그리는 삼류 화가, 거리의 악사들이다. 질문이 곤혹스럽지만 칠판에 ‘나에게 화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용감하게 썼다. 친구들 반응은 엇갈렸다. ‘황당하다. 멋지다. 너 답다.’ 꿈은 열심히 꾸면 이루어진다. 반쯤은 성사된다. 당장은 이루지 못해도 계속 그 쪽으로 올인 하면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는 가지고 산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은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나혜석(羅蕙錫, 1896~1949)은 사법관과 군수를 지낸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진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중 유부남 최승구와 자유분방하게 연애를 했지만 연인이 폐병으로 사망한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해 옥고를 치르고 친일 성향의 김우영과 결혼한 뒤 첫 개인전을 가지며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며 파리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ère)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 동안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불륜 관계로 발전했고 김우영과 이혼하게 되면서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다.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 자신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정조라는 것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주체의 자유 의지에 속하는 ‘취미’의 문제라고 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림이 불타고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병에 걸려 몰락의 길을 가게 된다. 한국판 ‘ 인형의 집 ’ 노라가 된 나혜석.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였던, 선택 받은 천재 화가는 선택 받지 않는 삶을 살다가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한다. 구속을 싫어하던 자유로운 영혼은 행려병자로 떠돌며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외로운 생을 마감하지만 닫힌 시대의 문을 열어주는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는 저마다 주홍글씨를 달고 산다. 자신의 가슴 속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감추고 살아간다. 힘겹게 무거운 망또 걸치고 길 위에서 길을 간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한 번도 안 가 본 길을 가는 사람은 시대를 앞서 간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취로 완성된다.  
 
산다는 것은 길 위에서 길을 찿아나서는 나비의 날갯짓이다. 길 위에 길이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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