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빈 들은 빈 들이 아닙니다
눈이 내린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간다. 높은 측백나무 위에도, 낮은 향나무 위에도 마른 풀잎 위에도, 거리에도, 빈 들에도 눈이 내린다. 하늘 가득히, 바라보는 내 눈 앞에 하얀 쌀가루처럼 눈이 내린다. 눈을 감는다. 손에 잡히듯 다가오는 비탈길, 그 비탈길에도 눈이 쌓인다. 그때를 기억하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한편 그 때만큼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다.
미끄러지는 눈길 위에서 연탄 50장을 싣고, 밀고 당기면서 비탈을 올랐다. 언덕 길 화실, 썰렁한 난로에 연탄불을 지핀다.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음률이 하늘을 타고 내려온다. 내게는 오랫동안 꿈틀거렸던 시간이었다. 잠들지 못하고 빈 들에서 발을 구르며 봄을 기다렸던 젊은 날이었다. 여전히 내 것을 움켜 잡은 채로 말이다. 소유와 무소유, 존재와 사라짐의 긴 여운을 남긴 밤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서로의 존재를 바꿔가며 인생의 긴 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 옳고 그름의 잣대도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어제의 가난과 불행이 오늘의 부와 행복을 가져 오게 된 동기가 된다면, 무 존재의 정의도 이미 존재라는 명제 속에서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정원을 가꾸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잡초를 뽑아주고,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구역을 정리하고, 흙을 고르는 일이다. 이 일은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적은 묘목을 가꾸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보이는 정원만 그렇겠는가? 마음 속에 자라는 잡초,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안을 채울 새로운 용기와 꿈은 꽃으로 피어날 수 없으니까.
빈 들에서 수 없는 생명을 본다. 보이는 것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 들리지 않지만 들을 수 없을 뿐 소리의 파장은 공기 속에 가득하다. 빈 들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이 오듯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꽃 한송이 피워낼 마음밭의 경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 내리는 저녁, 빈 들에 서서 하얗게 변해가는 나도 빈 들의 한 풍경으로 점점 작아져 가고 있다. 빈들의 봄을 함께 꿈꾸며….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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