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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그리운 맛, 그리운 사람

새로 산 오븐에서 옥수수 빵을 구워낸다. 인터넷에서 시키는 대로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빵맛과는 다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점심시간이 되면 학급 당번이 알루미늄 큰 쟁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강냉이빵을 가득 담아왔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정한 학생들만 먹을 수 있었다. 어쩌다 조금 얻어 먹어보면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눈 앞의 맛있는 빵들을 누가 먹는지 묻지 않아도 ‘그려려니’ 했고, 먹는 어린 학생들도 당당하게 먹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실 안은 다르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는 점심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3분의 1가량 됐었다. 학생들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마는 그 학생들에게 무료 급식은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심리적 측면에서 예민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단체 무료 급식을 지향했지만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유한 학군에서는 급식의 질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부모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과 그 당시의 국가 경제 사정과 교실 안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때 눈앞의 강냉이빵을 얻어 먹지 못해 침을 삼켜야만 했다. 우리 교실은 콘크리트 건물의 교사 뒤편의 별채에 있었는데 큰 부엌이 가까이 있었다. 3교시 끝나면 강냉이빵 익어가는 냄새가 코 끝에 다가왔고 우리는 부연 김이 그득한 부엌 안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지나다녔다. 아궁이에 장작불이 타고 있는 부엌에는 몸집이 큰 초로의 아주머니가 가마솥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을 피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옛날 아주머니의 그 모습은 늙지 않은 채 정답게 떠오른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강냉이빵 맛은 매우 독특해서 일품이었다. 요즘 멋진 테이블에 놓인 어떤 빵도 그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아마 따끈따끈한 노란 빵을 얻어 먹지 못해서 생긴 심리적인 맛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강냉이빵 급식은 더 이상 없었다.  
 
내 뒷자리에는 박금자라는 학생이 있었다. 수줍음이 많고 말이 없던 그 아이는 나도 모르게 번번이 내 연필들을 깎아서 필통에 가지런하게 넣어 주고는 했다. 하굣길에는 집이 같은 방향인 친구들과 옛날이야기 잘하던 아이 얘기를 들으며 함께 걸어갔는데 집이 가까운 그 아이와는 일찍 헤어져야 했다.  
 
그의 집은 마당의 둑 밑에 철로가 지나가는 작은 언덕에 있었으며 방 안은 낮에도 어두웠고 동생들이 몇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모교로 인사 가는 길에 소도시 길 건너편에 엉거주춤 서있는 알 듯 말 듯한 친구를 보았다. 파마 머리에 월남치마를 입은 새댁이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 박금자임을 알았다.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원망 한 마디 없이 열심히 살아왔음을 나는 눈을 감고도 장담한다.  
 
그러나 차라리 할 말 다하고 일신을 위해 어거지라도 쓸 배짱이라도 생겼거나 아니면 명품을 걸치고 남편하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이라도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지금 친구의 손이 매우 거칠고 혹은 병석에 누워있을지라도 옥양목 같은 심성으로 한 세상을 건너 왔을 그의 손을 잡고 싶다. 같은 재료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강냉이빵을 잊지 못하듯이 찾을 수 없는 그 친구가 그립다. 

권정순 / 전직 교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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