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한국의 가을이 깊어가나 싶더니 이른 첫눈이 오고 바로 겨울이 되었다. 가을을 느끼지도 못한 채 오버코트를 입게 되었다. 장례식을 염두에 두고 검은색 가을 옷 몇 벌을 챙겨왔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엄마 옷장을 뒤져보았다.엄마의 집엔 응급실에 실려간 6월의 달력이 그대로 걸려 있다. 낙상사고 후 뇌수술과 고관절 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으로 퇴원을 했기에 이 집에 다시 못 오고 돌아가셨다. 그 5개월의 시간 동안 엄마는 임종 중이었다. 몸이 서서히 나빠지면서 우리는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어졌다.
귀가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기관이라기에 모두들 엄마 귀에 대고 감사했다고, 사랑했다고 말했다. 과거형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나뿐인 사위가 엄마가 가장 좋아할 인사를 했다. “장모님! 장모님 덕분에 하나님을 알고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사위를 사랑해주시고 늘 기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통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장모님 딸은 제가 잘 돌볼 테니 염려 마세요.” 이 말을 들으려고 우리 내외를 기다리신 것 같았다.
엄마가 평소에 입던 옷이 걸쳐진 의자엔 무릎이 불쑥 나온 추리닝 바지가 걸려 있다. 오래전 내가 입다 친정에 버리고 간 옷을 엄마는 계속 입고 계셨던 거다. 딸이 많이 보고 싶으셨나? 엄마 맘을 이제야 헤아려보는 못난 자식이다. 옷장 속에서 얼추 맞는 엄마 외투를 골라 입으니, 엄마와 꼭 닮아 깜짝 놀랐다고 친척들이 한 마디씩 한다.
엄마의 옷장에는 내게 보내려고 모아 놓은 속옷과 내의, 양말 뭉치가 담긴 상자도 있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보내주시던 것이어서 뭉클했다.
살아있을 때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세상을 뜬 후에야 후회를 담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뒤늦게 서로를 돌아보고, 비로소 먼저 간 사람을 추모한다. 팬데믹으로 오래 못 만났던 친척들이 모였다.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식사를 함께하고 울고 웃는다. 늘 그렇듯이 죽은 이가 산 자를 불러 모은다.
15분 거리의 화장장에 모시려고 45만 원짜리 리무진을 빌리고, 하루 입고 소각될 50만 원 베옷을 입혀드렸다. 즐비한 화환으로 애도한들 이미 죽은 이에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그것들을 마지막 효도라 포장하고 슬픈 축제를 마쳤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었으니 그야말로 고아가 되었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실감한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헤어짐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엄마, 우리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날 때까지 편히 계세요” 부모님에 대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을 뿐이다.
이정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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