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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따뜻하고 겸손하게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정채봉 시인의 ‘생명’ 전문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훑어보는데 오래전 사진 하나가 눈에 뜨인다. 사오십대 여자 여섯 명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십여 년 전쯤 무슨 행사를 끝내고 찍은 것 같다. 활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 여섯 명 중에 세 명이 근래에 명을 달리했다. 급작스럽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코로나를 겪은 지난 2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90년대 초, 미국에 온 나는 모든 게 낯설고 어설프기만 했다. 한국에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았지만 활동 기간이 짧아 아쉬움만 컸고 뭘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여기도 문학단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섯 명은 그때 만나 동인 모임을 했던 문우들이다. 함께한 세월이 꽤 길다. 시간을 쪼개 문학토론회도 갖고 동인지도 펴내며 함께 문학의 길을 도모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동인 모임은 시들해져 시나브로 사라졌다. 관계도 미온적이 되어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해 오고 있었다.
 
사진 속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있었던 걸까 아득해지기만 한다. 시간이란 참 야멸차다. 잊힌다는 게 얼마나 매정한 일인가. 한 시절의 열정을 담고 있는 사진 한 장은 등 푸른 생선처럼 아직도 퍼덕이는 듯도 한데 말이다.
 
살다 보면 누군가와 척을 져야 할 때가 있다. 금방 풀고 화해를 하기도 하겠지만 오래 풀지 못하고 지내기도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사람의 관계는 생물과 같아 수시로 변한다. 관계의 요동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만도 아닌 자연스러운 변이과정이기도 하다.  
 
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위축시킨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외롭고 슬프게 한다. 그러나 사람을 멀리할 수밖에 없게 된 이즈음의 상황은 아마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야 한다는 역설 아닌가 싶다. 취향이 달라서, 성격이 달라서, 정서가 달라서, 이런저런 구차한 이유로 멀어졌던 사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는 걸 알게 하려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해본다.
 
 죽음이 삶보다도 쉬워지는 나이가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떤 경로로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 그가 먼저 떠날지 내가 먼저 떠날지. 먼저 떠난 이들은 남겨진 자들의 추억 속에서 희미하다.  
 
감사의 계절이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생명이야말로 은혜중의 은혜다. 도처에 죽음이 산재해 있는 것 같이 우울한 팬데믹 시대에 살아갈 얼마간의 시간을 확보한, ‘살아 있음’은 무엇보다 큰 감사임은 자명하다.
 
살아 있으므로 겪어야 하는 일들,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라든지 삶이 주는 고초라든지 그것이 비록 치명적인 아픔이라 할지라도 감사로 바꿔야겠다. 살아있으므로 겪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감사의 조건 아니겠는가.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살아있는 자들만의 특권이다. 아픔까지도 감사여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생명은 질긴 듯도 하지만 ‘오’하고 환호하는 사이 툭 사라지는 이슬방울처럼 여리기도 하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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