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바람의 얼굴을 보라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존 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 20세기 영미권 문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시인이고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수석사제였던 존 던(1572~1631)은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할 당시 이 구절이 들어간 ‘비상시의 기도문’을 썼다. 그는 자신에게 병증이 발견되자 병의 진행 과정과 내면세계를 반영한 23편의 글을 기록한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를 알기 위해 사제인 그에게 몰려 왔다. 전염병을 피하는 대신 교구민 곁을 지키기로 한 던은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성경을 연구하며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그에게 페스트의 징표인 반점이 생긴다. “양떼가 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금 왜 저를 쓰러뜨립니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을 지켜보는 일을 즐깁니까.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까.” 던이 하나님께 묻던 말이다. 당시 런던은 페스트가 3차례 휩쓸어 인구 3분의 1이 죽고, 3분의 1은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 책에서 던의 글은 ‘비참하다’란 말로 시작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족과 친구, 직장을 잃고 사업이 파탄 난 사람들이 지금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에 감사하며 무엇을 향해 누구를 위해 나의 종은 울리는가. 예전에 종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마침, 마을의 대소사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밀레의 ‘만종’은 황혼녘 전원에서 종소리 들으며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 사람이 죽으면 종을 쳤다. 존 던이 언급한 종은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종소리다. 어떤 자의 죽음이라도 내가 슬퍼해야 할 만큼 인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떤 혹독한 고난도 죽음의 경계 허물며 생명을 갈구한다. 중환자병동에 가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안다. 목숨줄 붙어있다는 단순한 현실이 희망이고 기쁨이다.
바람의 얼굴을 보라. 형체도 없이 그대 곁을 스쳐간다. 한 때는 비상하는 꿈이였고 불타는 만남이고 비장한 슬픔이였던 어제가 바람 속에 나부낀다.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진 사랑처럼 바람에 실려 가느다란 종소리로 사라진다. 바람은 울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기웃거리며 멈추지 않고 슬퍼도 애걸하며 어제에 매달리지 않는다. 바람은 눈물 닦아 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란 걸 안다.
추수감사절은 살아있는 자들이 벌이는 축제다. 남은 자들이 올리는 기도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쓰러지지 말고 살라고 다짐하는 언약의 종소리다. 참고 견디며 살다 보면 작은 것에 감사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하며 낮아지고 작아지면 쨍 하고 해 뜰 날 오지 않아도 생이 충만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흔들리는 시간의 갈림길에 선 그대여! 바람 속에 실려오는 종소리가 죽음을 알리는 타종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축복 되기를 간구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종소리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맞으소서.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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