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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길의 끝, 당신의 집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이 있듯이, 핸드폰에 입력된 세계 구석구석의 지도가 저장된 있듯이 내 머리 속에도 지도가 있다. 그 지도 속에는 강도 있고 산도 있다. 골목길도 있지만 4차선 고속도로도 있다. 호수도 있고 호수를 닮은 하늘도 있다. 그 지도를 멀리서 무심히 바라볼 때도 있지만 때론 가까이 당겨서 꼼꼼히 챙겨볼 때도 있다. 멀리 바라볼 때 느끼지 못한 감정을 가까이 볼 때는 느낄 수 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면 어떤 장소에서는 행복과 기쁨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와 행복해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슬픔과 어둠에 눌려 깊은 수렁에 빠져 우울해질 때도 있다. 내 머리속 지도에는 길과 방향만 보이는 게 아니라 감정이 담긴 추억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곳에는 유독 가족들 얼굴이 보여 아련한 그리움에 빠지기도 하고, 기억의 창고에 수북해 쌓인 먼지를 훅 불어내면 친구들 얼굴이 밤하늘 별처럼 하나 둘 반짝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유독 한 사람, 일생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가 떠오르는 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늘 흥건히 젖을 때가 태반이었다.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내 속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지도의 시작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 그리듯 시작되었다. 집 근처의 골목길과 봉오리가 둥근 앞산, 종이배를 접어 띄었던 실개천. 느티나무가 쭉 뻗은 학교 가는 길, 사람이 복작였던 시장, 계단이 아주 높은 교회당이 보이는 언덕길. 집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작은 지도는 학교에 다니면서 더 넓어지고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 주변을 벗어난 내 걸음은 먼 곳까지, 깊숙한 곳까지 지도 위에 길을 만들었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짠내가 묻어나왔고, 사랑과 우정의 길목엔 여럿의 얼굴들이 겹쳐 그려졌다. 슬픔과 기쁨, 안타까움과 행복의 순간들이 구석구석 길 위에 담겨졌다. 지도 속 길들은 길 위에 또 길을 내기도 하고, 걸었던 길 옆으로 실개천 흐르듯 구불구불 흘러 가는 작은 길들이 생겨났다. 양쪽으로 곱게 머리를 딴 소녀를 처음 만나 짝사랑하던 버스 정거장. 야외 스케치를 떠나던 기차역, 긴 강줄기를 끼고 만난 시골 간이역, 하늘하늘 흔들리던 코스모스길 위로 솜사탕처럼 피어오른 뭉게구름. 책장을 넘기듯 연이어 떠오르는 길, 풍경, 추억들…. 젊은 날의 기억들을 새겨놓은 길 위로 안개처럼 그리움이 피어난다.  
 
많은 날들이 지나고 수없이 많은 계절이 오고 또 갔다. 요즈음 그 수 없는 길들을 돌아돌아 다시 내게로 온다. 미시간 호수가 바다같이 떠있는 Lakeshore Drive 이방인의 거리에 길게 가로등이 켜진다. 멀리서부터 가까이로, 내 앞을 지나쳐 반대편 쪽으로…. 순간 어린 시절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길들이 가로등처럼 차례로 켜진다. 멀고도 긴 여정 속에 오늘도 난 집으로 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긴 자동차 행렬 속 맞은편으로 커다랗고 둥근 하루가 저문다. 시카고에 정착한 이후 내 지도는 많은 길들을 담지 못했다. 나의 발걸음은 긴 여행길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장소 같은 방향으로만 뻗어 있다. 집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집으로, 간혹 돌아오는 길에 호수 쪽으로, 집 앞 언덕으로 오르는 길 위로 길은 발자국 위에 또 발자국을 담고 있다. 
 
삶은 끊임없는 걸음의 자국이고, 삶은 그 자국에 남겨진 향기가 아닐까? 나이듦의 깊이는 나에게서 시작된 아침이 너에게로 향하는 저녁으로 내려앉는, 주어의 전환이 아닐까? 꽃 피우듯 물들어가는 계절이 가고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날, 내 지도의 길은 하얗게 지워질 것이다. 언제 그 많은 길들을 걸었었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길 위에 나 홀로 서 있다. 세상은 그 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의 삶을 움직이고 그 길로 나를 인도 했으며 그 길 위에 슬픔을 뿌리고 행복의 꽃을 피우게 했던 그분. 그분만이 내 지도, 그 위에 펼쳐 놓은 수많은 길들을 바라보지 않을까? 나이 들어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으실까? 긴 여정, 굽이굽이 돌아온 그 길고도 아득한 지도 속에서 이제와 돌아보니 그 길의 끝은 언제나 당신의 집이었다. 나도 모르고 걷던 나의 모든 길은 당신을 찿아가던 당신의 집이었다.(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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