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아주 특별한 날에는
어릴 적 우리 집에 ‘아주 특별한’ 이모가 세 들어 살았다. 그 때 한 동네에 사는 여자는 모두 이모라 불었다. 그 이모 둘째 딸이 내 단짝 친구였다. 이모는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고 상냥하고 요리 솜씨가 아주 좋았다. 도시락 반찬은 밑반찬 가게 뺨치게 예쁘고 정갈하게 만들었는데 점심시간이면 된장 고추장 범벅이 된 내 도시락 반찬을 내놓기가 민망했다.
‘미녀 박복’이라 했던가. 그런 이모가 삼일이 멀다고 남편에게 얻어맞았다. 보통 때는 새양쥐 같이 차분한데 술만 취하면 가구던 아내던 닥치는대로 부수고 때리고 난동을 벌인다. 이모가 다른 놈과 바람 피운다고 눈알이 뒤집혀 날뛰는 남자를 말릴 사람이 없는데 그나마 우리 엄마가 말리면 좀 수그러들곤 했다. 자기 마누라가 친구 담임선생과 눈 맞아 사바사바(싸파싸파, 娑婆娑婆) 하는 거 봤다고 했다. ‘사바사바’는 몰래 부정한 방법으로 뒷거래 하는 것을 말한다. 술이 깨면 청상과부로 절개 지킨 우리 어머니 존경 한다며 눈물을 떨구곤 했는데 수입이 괜찮은 친구네가 피신처로 우리 집 아래채에 살게 된 이유다.
전쟁 같은 소란이 끝나면 이모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부서진 가구 정리하고 방바닥 닦고 세수하고 화장하고 요리를 했다. 어떤 날은 머리통이 찢어져 피가 났다. 반창고 바르고 머리 손질 하고 예쁜 옷 입고 장 보러 갔다. 의처증 남편에게 피 터지게 맞고 웬 화장이냐고 동네사람들은 수군댔다. 담임선생이 울릉도로 전근 가고 전쟁은 끝이 났다. 이모가 자식 넷을 버리고 자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이모가 어디서 무얼 하며 누구와 사는지 알지 못했다.
반짝이며 스러지는 날들 속에 시간은 빨간 불 켜고 아득한 상형문자로 다가온다. 해맑은 소년이 건네주던 감꽃 목걸이를 기억한다. 유년의 풋사랑은 아스라히 사라지는 별빛이었나. 첫사랑은 생의 어둔 골목마다 둥근달로 차올랐지만 오동나무 가지에 걸려 오도가도 못했다. 가슴 이지러지게 아픈 사랑은 한줌의 재로 남았다. 그 모든 시간들 속에서도 나의 ‘아주 특별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어떤 모진 순간에도 잘 챙겨먹고, 차려 입고, 버티며 참고 견디라 달랜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 되는 일상의 반복이 나의 아주 특별한 날이라고.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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