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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맛과 멋]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기도하게 됩니다. 높은 하늘, 파란 하늘이 슬프고, 지구에 색동옷 입히는 단풍도 슬프고, 소슬한 바람도 슬프고, 귀뚜라미 소리도 슬프고, 붉게 익은 사과도 슬프고,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전어도 슬프고, 뜨거운 칼국수도 슬프고, 농익은 호박도 슬프고, 도깨비도 슬프고, 한 송이 핀 빨간 동백꽃도 슬프고, 대추차도 슬프고, 계피 향도 슬프고, 땅콩버터가 몸뚱이보다 더 크게 올라간 사과 조각도 슬프고, 탄생도 슬프고, 죽음도 슬프고, 아픔도 슬프고, 홍시도 슬프고,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도 슬픕니다.  
 
슬픔은 그러나 그리움일 수도 있고, 동경일 수도 있고, 기다림일 수도 있고, 애달픔일 수도 있고, 애모일 수도 있고, 용서일 수도 있고, 고해일 수도 있으며, 후회와 비감과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방황과 고뇌와 외로움, 동경일 수도 있으며 위로와 안도와 허무, 탄식일 수도 있으며 종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고정희 시인의 말처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여백’이랄 수 있겠습니다. 가을에 드리는 기도는 그래서 감사의 기도로 귀결됩니다.  
 
오늘 제가 살아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술 후 회복이 아주 빨라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침이 훨씬 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빨리 걸어도 전처럼 숨이 많이 차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더위를 탑니다. 그런데 요즘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제가 걷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그래서 오늘 2마일 걸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냄비를 태우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빨래도 했습니다. 빨래하고 나면 빨아서 깨끗해진 옷들처럼 내 마음도 깨끗이 빨래한 것처럼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어리굴젓을 샀습니다. 매우 맛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친구가 사과밭에서 딴 사과를 갖다 주었습니다. 사과 향이 진하면서 맛이 신선하고 입 안에 향기로운 단맛이 넘쳤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동안 멀어졌던 독서가 다시 맛있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짜장면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덕분에 시중에서 파는 인스턴트 파우더가 별맛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참하게도, 강하게도 만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이루는 데 드는 에너지는 같다”는 카로스카스테네다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라,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박완서 선생의 문학도 보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엄마의 말뚝’이란 단편에서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라고 일갈하셨는데, 선생의 큰따님인 작가 호원숙은 이 구절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포함,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 구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세상의 이치를 깨쳐 자유롭게 나가는 상태를 그리게 된다’고 합니다.
 
가을 아침, 창밖의 고목을 바라보며 의식의 흐름에 정신줄을 놓으니 이런저런생각들이 엉킵니다. 박완서 선생의 신여성이 되어 자기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기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삶의 모퉁이에 다다르지 않을까. 아니 우선 전혜린 선생처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기도부터 마칠까 합니다.

이영주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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