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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뒷걸음치다가 소가 잡은 것은

입에 착착 감겼다.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맛있는’ 음식이 내 눈앞에 차려졌다.  
 
사흘 전 남편이 뜬금없이 말했다. “나 이 집에서 못 살겠어. 당신이 해 주는 음식을 먹고 내가 이렇게 됐잖아.” 병원 체크 업에서 한 피검사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내가 해 먹을 테니, 나에게 신경끄면 좋겠어.”  
 
남편은 밥을 나보다 세 배쯤 많이 먹는다. 마켓에 가면 왕만두나 가래떡을 재빨리 낚아챈다. 새우깡도 덤으로 집는다. “햄버거 먹고 들어갈까? 짜장면 먹을까?” 남편의 유혹에 나도 넘어간다. 문제는 똑같이 먹어도 남편만 당 수치가 오른다는 점이다. 음식을 하지 말라니 반갑긴 해도, 비난 조의 말투에 나도 화가 났다.
 
다음날, 남편은 말도 없이 일찌감치 나갔다. 흙이 잔뜩 묻은 채소들을 펼쳐 놓고 파는 야외시장이 있다. 남편은 장사라도 할 것처럼 잔뜩 사 들고 들어왔다. 커다란 찜기에 감자, 양배추, 비트, 셀러리, 홍당무 등등 채소라 이름 붙은 것은 다 넣는다. 양배추는 씻지도 않고, 생닭 가슴살도 야채 위에 얹는다. 부엌을 내주고 구경만 하던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려다가, 심통 난 그의 입을 보고 내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찐 야채와 닭가슴살을 끼니마다 가득 먹었다. 끼고 돌던 밥을 이틀 동안 한 수저도 먹지 않았다.  
 


아침에 남편이 “장염인가” 중얼거린다. 배가 따끔거린다고 한다. 순간 날 닭고기가 스쳐 지나갔다. 채소 위에 얹고 쪘으니, 덜 익었던지, 균이 야채에 묻었을 것이다. 남편은 왕창 쪄놓은 자신의 작품을 난감하게 쳐다본다. 큰 냄비에 그것들을 쓸어 넣고 물을 붓더니 팍팍 끓인다. 케첩도 풀어 넣는다. ‘어휴 저 꿀꿀이 죽을 어떻게 먹으려고.’ 움직이는 폼이 삼 일 전보다는 기가 죽은듯했다.  
 
“당신도 먹어볼래?” 별 기대는 없었지만, 남편이 만든 것을 한 입 먹어줬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 맛이 괜찮았다. 뭐지 뭐지 이 깊은 맛은? 아, 비트구나! 개성이 강한 비트가 은근해졌다. 양파와 셀러리가 닭고기의 질주를 막았고, 온순한 양배추와 달콤한 홍당무가 한 편을 먹었다. 걸쭉한 감자 선생님이 휘휘 저어 주기까지 했다.
 
몇 년 전,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 비트 수프를 처음으로 먹었다. 오리고기와 허브와 갖은 채소가 들어가서 감칠맛이 대단했다. 몸이 뜨끈해졌다. 음울한 거리를 추운 줄도 모르고 걷다가, 불빛이 깜박이는 카페를 찾아 들어간 기억이 난다. 까맣게 잊어버린 비트 수프를 남편이 끓이다니.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기도 하는구나!  
 
나는 이제 부엌을 도로 찾았다. 비트 수프를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닭고기를 생강술과 강황 가루로 재웠다. 통마늘과 양파를 넣고 고기를 먼저 브라우닝 했다. 토마토와 채소들을 잘 씻어서 껍질째 통째로 넣었다. 힘센 러시아 여자가 아닌 나는 팔을 아껴야 한다. 한 시간 후에 감자는 툭툭 갈라지고, 채소는 칼질 서너 번하니 쪼개졌다. 소금이나 케첩 혹은 액젓 두 방울이면, 상황 끝! 겨울 아침이 단풍색의 비트 수프 덕분에 훈훈해질 것 같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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