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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우리 삶의 두 가지 설거지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은 가뭄과 산불로 속절 없이 타들어 가던 마른 땅에 잠시나마 해갈의 기쁨을 안겼다. 남가주에 내린 비는 땅만 축이지 않았다. 팬더믹 여파로 잔뜩 긴장한 채 버티느라 강퍅해진 우리의 마음도 촉촉하게 적셨다.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마음이 괜스레 울적해지면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잿빛 구름으로 덮인 하늘에 제비가 낮게 날고, 꿉꿉해진 땅에 흙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집마다 장독대 닫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에 널어 놓은 빨래며 옥상에 말리던 고추를 거둬들이는 손길도 분주히 움직였다.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비설거지 혹은 그냥 설거지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설거지는 먹고 난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을 말한다. 또, 어떤 일을 치른 다음에 하는 뒤처리도 설거지라고 한다. 때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뒤치다꺼리를 설거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설거지는 나중에 하는 설거지와 미리 하는 설거지가 있다. 일이 끝난 후에 하는 정리와 마무리가 나중에 하는 설거지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해서 치우거나 덮는 일은 미리 하는 설거지다.  
 


세상에는 나중에 하는 설거지도 많지만 미리 해야 하는 설거지도 꽤 있다. 여름 내 입었던 가벼운 옷을 집어넣고, 두툼한 옷을 꺼내는 겨울 채비도 미리 하는 설거지다. 앞길을 가로막는 어려움을 하나하나 치우며 가는 노력도 미리 하는 설거지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것도 미리 하는 설거지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고, 어수선산란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설거지를 한다. 주소록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넣고 빼면서 관계의 설거지를 하기도 한다. 그동안 오해로 서운했던 기분은 풀고, 미안한 마음은 사과와 용서로 정리하는 것은 감정의 설거지다. 한 해 동안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부었던 말을 어느 정도 쓸어 담는 것은 언어의 설거지다. 새로운 기대와 함께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과 빈틈없는 자세로 새해를 맞으며 미리 하는 설거지도 한다.  
 
인생에는 두 가지 설거지가 모두 필요하다. 인생을 잘 정리하는 뒷설거지도 있어야 하지만, 삶의 마무리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미리 하는 설거지도 중요하다. 인생을 정리하는 이 두 설거지에는 차이가 있다. 세상에서는 뒷설거지나 미리 하는 설거지가 모두 내 몫이지만 인생의 설거지는 그렇지 않다. 미리 하는 설거지는 내가 할 수 있지만 나중에 하는 뒷설거지는 누군가가 나 대신 해줘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정리할 때 하기 싫은 설거지 억지로 하지 않도록 미리 하는 설거지를 통해 인생이라는 그릇을 어느 정도 깨끗하게 치워야 할 때다. 욕심, 교만, 시기, 미움, 속상함, 억울함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그릇의 설거지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낸 생채기는 누가 아물게 할 것인가?
 
비가 내리기 전 덮을 것은 덮고 치울 것은 치우는 비설거지를 하듯, 인생이 저물기 전 미리 하는 설거지를 통해 뒷설거지하는 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정리할 것은 정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을비를 통해 배웠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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