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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안개 속으로

치적치적 비가 내린다. 그야말로 가을비다. 떨어진 나뭇잎이 모자이크처럼 보드블락에 붙어있다. 빗물에 젖어 서로 엉켜 갈색, 담황색, 간혹 잘 물든 붉은 빛의 작은 잎새도 어울려 어느 쪽 한 부분을 떼어내더라도 그야말로 어느 화가도 근접할 수 없는 훌륭한 미술작품이다.

아침엔 안개가 잔뜩 끼었다. 멀리 나무의 형태가 뿌옇게 다가온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엉켜 마치 한가족처럼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저 멀리서 다가온다. 언제 부터인가 이런 날엔 세미한 작은 포말의 촉촉한 습기를 느끼며 자욱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오늘 아침 시카고로 내려오는 길 90번 하이웨이 오른편으로 길게 뻗어있는 Higgins park에 드리운 안개가 자못 몽환적 이었다. 온 숲을 감싸 안은 안개는 뿌옇게 흐려진 또 하나의 Reality처럼 보인다. 모든 풍경이 빛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온 이미지라면, 그 이미지를 내 안에 기억하고 품는 건 머리의 역할이 된다.

보이는 것(see)과 보는 것(watch)은 엄연한 차이가 있듯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며 생각이 나면 나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라면 머릿속에서 기억되지 않는 사라진 것이다.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더불어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부정해도 자꾸 떠오르면 그건 내 안에, 내 삶에 이미 한 부분이 되어 같이 있는 것이다. 그리움도 그렇다 그건 아픔의 기억 일지라도 그 것은 분명 행복이다. 어디에서 무슨 연유로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가 보였다. 또 누군가가 깊은 안개 속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것도 보였다. 그건 모두 나였다. 그건 짧은 순간의 일이기도 하고 긴 시간의 연결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떤 시절의 이야기로 남기도 하지만 돌이켜 살펴보면 삶 전체를 아우르는 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70년을 돌아 안개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 긴 시간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일생을 돌아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안개 속에서 산다. 우리의 뜻대로 돌아가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미로처럼 막힌 담 사이를 쉼 없이 달리다가 문뜩 안개 속에서 걸어나온다. 무엇을 만들고, 찿아내고, 지쳐 잠들고, 다시 깨어나고, 내가 살던 세상에서 뉘엿뉘엿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고, 노을이 물드는 언덕에서 노을 속에 놀다가, 점점 어두워지는 밤. 긴 꼬리의 별통별을 바라보며 잠들게 되는, 내 어머니가 그랬고, 내 할머니가 그랬을, 하늘의 별이 되어 눈감을 수 있으리라. 그리움은 살아가는 이유이기에 그리움이 묻히는 날 비로소 안개 걷친 거울을 통해 나는 너의 얼굴을 너는 나의 얼굴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 (시인, 화가)

소소한 일상이 인생이더라구요
걸어간 길들이 인생이더라구요
왔던 곳으로 되 돌아간 후
그걸 깨닫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글썽이는
다른 사람들 몫이더라구요
그래도 좋아요
내 어머니의 길을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길을
거울을 통해 보듯
안개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
그 사람의 걸음이 내게 주어진
삶의 질량이더라구요
눈을 비비지 않아도
그리움은 낙엽처럼 흩어져
걸어온 길 위에 쌓이더라구요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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