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솔트 앤드 페퍼’
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 뒤여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고생으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고, 수술 후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우울 모드였다.그때 옆에서 우리 내외를 유심히 보고 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런다. 뜨헉! 누나라고 해도 봐드릴까 말까인데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픈 나를 격려하려던 그 말이 실언임을 파악한 그분은 미안한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병원에서 오던 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하고,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래야 내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염색머리로 잘 지내다가 팬데믹이 미용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았다. 1년 만에 들른 미용실에서 원장님 말씀이, 검은 염색 물이 빠져 브라운이 되고 흰머리가 나온다며 유행색인 ‘애시 브라운(ash brown)’이 되었다고 그대로 보기 좋다고 한다. 길이만 다듬고 그냥 두었다.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남편이 자신의 바리캉으로 내 머리를 다듬어주곤 했다. 지난주 교우의 아들 결혼식에 가느라 다시 1년 만에 미용실에 갔다. 이젠 예전의 염색 흔적은 없어지고 새치와 약간의 검은 머리칼이 섞여있다. 원장님이 보더니 올해는 멋쟁이 색깔이 ‘솔트 앤드 페퍼 (salt & pepper)’라며 딱 맞춤 색이 되었다고 한다. 돈을 번 기분으로 또 다듬기만 했다.
백발에도 유행이 있나 보다. 소금과 후추가 믹스된 머리색이라니 그 표현이 재미있다. 가만 생각해보니 팔복으로 시작한 산상수훈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고 이미 사람을 소금에 비유한 예가 있었던 걸 기억했다. 그러니 머리칼에 소금과 후추 운운은 대수롭지도 않은 표현인 것이다.
머리칼에 소금이라는 형용이 붙은 바에 그 뜻처럼 사는 삶에 대해 생각을 확장해보았다. 소금 속에는 소독과 살균작용을 하는 염소이온이 들어 있어서 많은 독소들이 유입이 되어도 썩지 않고 유지가 된다고 배웠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기본 조미료이다. 아무리 다른 양념을 많이 넣는다고 해도 간이 안 맞으면 음식이 맛이 없질 않던가.
빛이나 공기나 물은 모든 생명체에 꼭 필요한 것들로 누구나 알고 있다. 소금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소금 역시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왕 소금 머리가 된 김에 세상을 정화시키고 살맛이 나게 하는데 일조하는, 짭짤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이정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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