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차근차근 천천히
일요일 새벽 달리기를 나갔다. 동이 트기 전이지만 주말에는 뛰는 사람들이 많다. 3마일쯤 갔을까. 젊은 청년이 의자에 앉아 넋 놓고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다. 자세도 반듯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무슨 고민이 많은지 혹시 어젯밤부터 앉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6마일을 돌아 다시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그대로 앉아있다. 잊어버리고 한 주가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에는 어깨와 팔이 축 늘어져 머리를 푹 숙이고 걸어오고 있다.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개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데도 쳐다보지 않는다.젊은 백인 청년이 무슨 변화가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 가족 중에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나 아니면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내가 이혼 선고를 했나, 의사가 중병 걸렸다고 진단서를 내밀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은행에서 집을 압류하여 갈 곳이 없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뛰다 보니 10마일을 훌쩍 넘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이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세상살이에 조급함을 느낀다. 바라는 결과를 빨리 얻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는 먹어 가는데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성실함까지는 좋았지만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과정을 즐기기보다는 결과만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빨리 뛰려고 애쓰지 않는다. 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주를 마치고 몇 시간 걸렸냐고 숨을 몰아쉬면서 묻는다. 조금 빨리 뛰었다고 큰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록 경신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시간에 매달릴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목이 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집착을 내려놓고 소연해지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지 않아도 갈증을 채워줄 생수가 기다리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아흔 살의 건축가 츠바타슈이치 할아버지는 말한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내레이션도 인상적이다.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진다. 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가 여물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고 잎이 떨어지고 땅이 비옥해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히 하나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걸음을 걸을 때도 한발 한발 움직임을 알아차리며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어딘가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곳이 내가 도착하려고 했던 곳이 아닐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근차근 천천히 걸어가는 방향이라면 분명 그곳은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보다도 훨씬 멋진 곳일 테니까.
달리는 버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제자리 뛰기를 한다고 해서 버스가 목적지에 더 일찍 도착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감상하거나 버스에 함께 탄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는 일이 더 값진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봤던 백인 청년도 지금은 감당하기 벅찬 일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리를 하고 나면빈자리가 눈에 보일 것이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차근차근 천천히 메꾸어 가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중한 시간으로 알찬 소득을 얻어 힘들었던 어제의 삶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
양주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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