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12>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 송종규 박사
수업 장소 간절했지만 가는 곳마다 번번이 퇴짜
아이들 콜라 쏟고 어지럽혀 어렵게 구한 곳서도 쫓겨나
"뿌리 교육 더 늦출 수 없다”십시일반 한마음 성원 결실
1981년 한국학교 첫 수업, 몇 시간씩 운전해서 오기도
한국학교는 한국 밖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한글과 더불어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를 통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민족의 얼도 이어간다. 조지아를 비롯한 동남부 지역에도 여러 한국학교가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곳이 애틀랜타한국학교(교장 김현경, 이사장 이국자)다.
지난 5월 8일 둘루스 주님의영광교회에서 애틀랜타한국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졸업식도 겸했다. 장기근속 교사들이 표창장을 받았고 11명의 학생이 졸업장을 받았다. 또 송종규 초대 한국학교 교장, 박선근 한국학교 개교 당시 한인회장 등이 이날 행사에 참석, 개교 40주년을 축하했다.
한글날 575돌을 앞두고 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겸 이사장을 만나 개교 전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애틀랜타 한국학교 이전에도 한국학교는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학교 부활에 대한 한인사회의 요구가 커졌고 마침 한국 정부에서도 새로 한국학교를 지원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당시 한인회장이던 박선근 회장(현 한미우호협회 회장)이 남다른 추진력을 발휘해 한국학교 설립을 주도해 나갔다. 준비위원회도 구성되었고 후원 모임도 잇따랐다. 1
981년 봄인가 싶은데 한국학교 개교를 위한 후원 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20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모두 한인사회에서 쟁쟁한 분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냥 참석이나 하자고 해서 갔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된 것이다(웃음).
또 한국학교 초대 교장으로 덕망 있는 분을 모시려 했지만 후보로 거론된 분들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그 자리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게 됐다. 그때는 나도 의사로 한창 왕성하게 일할 때였지만 한인사회의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그래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 시작이니까 아무래도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다. 수업 장소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고 정관을 만들어 주 정부와 IRS 등에 비영리단체 등록도 해야 했다. 초창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커리큘럼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이런 일들을 위해 학교 안팎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선생님들도 참 많은 수고를 했다.”
송종규 박사의 회고는 2002년 출간된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에 실린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애틀랜타 한국학교는 1981년 7월 메모리얼 아트센터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교육관에서 처음 개교했다. 그 전에 당시 박선근 한인회장이 한국학교 창설 준비위원회(위원장 방창모)를 구성하고, 동 위원회에서 위촉한 이사회 초대 이사장 겸 교장으로 송종규씨를 선출함하는 등 사전 작업이 진행됐었다.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개교 첫해 한국학교 등록 학생은 미국인 학생 3명을 포함해 모두 115명이었다. 개교 당시 교사는 김경숙(국어), 강은희(음악), 안재복(미술), 나오희(음악), 지혜정(국어) 등이었다.
- 개교를 전후해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요?
“수업 할 장소를 구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곳을 찾아 다녔지만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당시 김경숙 선생과 함께 디케이터에 있는 어떤 미국 교회를 찾아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청소비, 수도비, 전기비 등 유틸리티 비용은 대겠다고 했지만 렌트비부터 갖고 오라면서 거절했다. 그 때 터덜터덜 걸어 나와 잔디밭에 앉아 한숨을 쉬어가며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얼마나 낙담이 되던지. 그렇게 열 곳도 더 되는 곳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하이뮤지엄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에서 허락을 해 주어 역사적인 개교를 할 수 있었다.”
-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그 이후엔 장소 문제는 없었나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교회에서도 바로 쫓겨났다. 아이들이 콜라를 쏟는 등 교회를 너무 어지럽힌다는 게 이유였다. 집 없는 설움을 절감하며 다시 수업 장소를 찾아다니는 게 일이 됐다. 다행이 1982년 1월 다운타운에 있는 애틀랜타 태버너클 침례교회(Atlanta, Baptist Tabernacle)에 새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장소 물색의 어려움은 한인 이민사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송종규 초대 교장에 이어 2대 김태형 교장, 3대 방창모 교장도 태버너클 침례교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고마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 교회 샤럿(Mr. Sarratt) 목사는 렌트비도 안 받고 교육관까지 쓸 수 있도록 적극 후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태형 2대 교장은 “아이들이 책상을 부수는 등 난리가 나서 샤럿 목사님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세상 모든 것과 교회안 모든 물건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 교회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태버너클 침례교회로 옮긴 애틀랜타한국학교는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수업을 하다가 1992년 8월에 한인천주교회 교육관으로 이전했다. 이후 노크로스고등학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외에도 교회나 성당 등에서 운영하는 다른 한글학교도 잇따라 생겨났다. 한인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만으로는 증가하는 학생들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도 한글 교습 외에 한국 역사, 태권도, 북, 민요, 서예, 역사, 동요, K-팝 등의 다양해지고 있다.
한편 애틀랜타한국학교는 지난해 2020년 9월 둘루스에 2452스퀘어피트 크기의 사무실을 구입,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학생도 선생님도 다들 열정이 넘쳤다. 1981년 첫 수업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학부모님들 역시 멀리 앨라배마에서도 오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몇 시간씩 운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말과 우리 글,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눈물겨웠다. 고국 떠나온 이민자로서 오히려 나라 사랑, 모국 사랑의 마음이 더 컸던 게 아니었나 싶다.”
- 한국학교를 운영하자면 돈도 많이 필요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송종규 이사장 명의의 후원 감사광고가 눈길을 끈다.
“수업료는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이사회를 중심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각계에서 여러 분들이 성금도 보내주셨다. 미국인 중에도 한국전 참전용사 등 성금을 보내주는 분들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데 아마 1982년 쯤인가 한국학교 기금마련을 위한 가수 이미자 초청 공연도 했었다. 다운타운 시빅센터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한인들이 성원했고 공연장도 거의 다 찼던 것 같다.”
- 그렇게 세운 한국학교가 벌서 40년을 맞았습니다. 초대 교장으로 또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40주년 기념식에 함께했다는 게 영광이다. 개교 초기 함께 수고했던 분들이 이젠 다들 연로해졌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데 그래도 우리가 시작한 한국학교가 40년이나 이어져온 것을 보면 모두 흐뭇해하고 대견해 하실 것이다. 10년 뒤 50주년 행사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더 멋지게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개인 이야기도 좀 들어보겠습니다. 1970년부터 애틀랜타에 정착하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애틀랜타 오기 전까지는 나는 조지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뉴욕에서 수련의로 일하면서 뉴올리언스로 출장을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숲이 많고 아주 좋아 보여 곁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저기가 바로 조지아, 애틀랜타라고 했다. 그때 속으로 아, 저기 가서 살면 좋겠구나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당시엔 여전히 흑백 분리 화장실이 있었고 식당도 백인과 유색 인종이 따로 들어가는 곳들이 많았다. 지금은 정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70년 초에는 한인사회라고 하기에는 한인들도 거의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조금씩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모임도 생겨나고 한국학교의 필요성도 더 커졌던 것 같다.”
-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 일하셨는데 미국에서 외국인 의사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1967년 뉴욕으로 왔을 때부터 정신없이 일했다. 1970년 애틀랜타에 온 후에도 전문적인 일을 해서 그런지 특별히 차별받거나 어려움은 없었다.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여러 인종의 수많은 아이들을 받았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 은퇴 후엔 어떻게 지내시나요?
“평생 일만 하느라 인문학 책을 많이 못 읽었다. 뒤늦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옛 친구들이 함께 하는 독서모임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딸이 가까이 살아서 손주 봐 주는 것도 요즘 우리 부부에겐 중요한 일이다.”
-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내가 이제 80이 넘었다. 지내 놓고 보니 인생은 지뢰밭 사이를 헤쳐 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고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오늘 좋다고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늘 겸손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학교도 교사와 장소 확보, 자금 문제, 교과 과정 수립 등 지난 40년 동안 문제는 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도 그렇게 잘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전 세계에 한국학교는 13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중 40년 역사를 가진 곳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애틀랜타한국학교가 오랜 시간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는 데 큰 역할 해왔다는 말이다. 애틀랜타한국학교만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모든 한국학교가 꿋꿋이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송 박사를 비롯한 모든 한인 1세대들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송종규 박사는
1940년생. 산부인과 전문의로 평생 일했다.
1964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대 3년을 마친 뒤 1967년 미국에 왔다.
뉴욕에서 수련의를 마친 뒤 1970년부터 애틀랜타 정착했다.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부인 송(박) 영혜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과 딸은 의사, 작은 아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한다.
글·사진=이종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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