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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백신 패스

제러미 벤담(1748~1832)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철학을 지켰다. 그는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해부 실습에 활용하고 박제로 보존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뜻대로 벤담의 시신은 박제로 만들어져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전시됐다.

머리는 박제 밑에 따로 전시되다 1975년 도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설립에 참여한 벤담은 이 대학 학생회관에 앉아 학생들과 매일 인사하고 있다.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대표하는 벤담의 사상은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른바 양적 공리주의다. 따져 보면 벤담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주창한 공리주의에 헌신한 셈이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발전시킨 건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다.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밀은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양적 쾌락에 대한 불만이다.

영국에서 공리주의가 탄생한 건 산업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제 성장으로 등장한 시민 계급이 귀족 등 소수 특권층과 맞설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다.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등장한 배경이다. 공리주의는 소수로부터 다수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철학적 장치였다.

소수에 맞서 다수를 대변해야 한다는 주장은 직관적이고 강력했다. 다수가 소수에 앞서야 한다는 건 민주사회의 공식처럼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인종·여성·성적 소수자의 역사는 이런 공리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이었다.

코로나19로 공리주의는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정부는 백신 접종 완료자에게 혜택을 주는 백신 패스를 도입할 예정이다. 뒤집어 말하면 미접종자 500만명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백신 패스 반대 청원이 올라왔다. 이들은 “알레르기 부작용으로 백신을 맞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불이익을 주는 건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자랑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는 다수를 위해 소수 자영업자의 영업권을 제한한 것이었다. 집회는 공공(다수)의 방역권이 우선이란 명목으로 금지됐다. 백신 패스도 다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될 가능성이 크다.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역사의 모래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강기헌 / 한국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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