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걷기예찬
“현대인은 자동차를 보자 첫눈에 반해 그것과 결혼을 했다. 그래서 전원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키이츠의 말이다. 미국에서 살려면 자동차는 필수품이다. 그런데 나는 차가 없다. 차가 없다는 것은 현대생활에서 치명적인 한계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차가 없으니 두 발로 걸을 수밖에. 다행히 나에게는 아직 건강한 두 다리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량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거리는 걷는다. 걷기는 좀 불편하지만, 나에게 삶의 활력과 사색의 조건이 되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사유하게 되자 삶의 의미가 더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길 위에 서서 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에서 나의 그런 작은 깨달음의 단편들을 포함해 걷기에 대한 예찬을 펼칠 수 있는 많은 사상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라는 말을 통해서 브르통은 걸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도보 여행은 인생의 맛을 충만하게 느끼는 경험이 된다. 걷기에 있어서는 오직 시간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의 고고학이며, 따라서 이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모든 인생의 참 맛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험이 된다고 브르통은 말한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인생이 주는 맛을 모두 비껴간 채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떤 욕망이 담긴 목적을 따라서 시간의 암흑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느끼고 있는 모든 일상의 분주함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허구인지도 모른다. 일상을 떠나서 걷게 될 때, 그래서 시간의 고고학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비로소 고대로부터 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인생의 참된 의미와 맛들을 체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브르통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도보여행자는 이름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며 “만인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걷기는 그 어떤 감각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든 감각의 경험이다. 심지어 계절에 따라 열리는 산딸기 머루 오디 개암 열매 호두 밤의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미각 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전신 감각의 경험이다.
인간의 걷기는 매우 역동적이다. 역학적이다. 습관적으로 걷다보니 의식을 못할 뿐이다. 전신운동이기도 하다. 걷고 있는 동안에 발에 있는 뼈와 근육, 인대, 힘줄 등의 움직임부터 목 주위의 근육과 조직까지 같이 움직인다. 우리 몸 구석구석 서로 긴밀한 협동작용을 통해 우리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걷기는 인간에게 주어진 참으로 귀한 선물이다. 사실 몸을 이용한 운동 중에서 가징 기본이 되는 것이 걷기다.
보행이란 얼마나 자유스럽고 주체적인 동작인가. 보행은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오직 내 힘으로만 가는 길이다. 흥이 나면 휘파람도 불 수 있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잠시 멈추어 설 수도 있다. 걸어온 길, 그리고 강을 돌아볼 수도 있고, 또 내가 넘어야 할 산을 헤아려 볼 수 있어 좋다. 차가 없으니 불편한 점도 많지만, 또한 놓치기 쉬운 삶의 또 다른 면도 볼 수 있어 좋다. 길 위에 서서 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시골길을 한나절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걷기는 고독한 행위다. 그 고독은 아무 쓸모없고 보상도 없다.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발바닥은 열기로 화끈거리고 종아리의 근육은 뭉치고 관절은 쉽게 피로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걷고 난 뒤 피로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몸의 아늑한 느낌과 충만감, 관능적인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걷는 자는 세계를 제 관능 속에서 향유하는 자다. 걷기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려면 혼자 걸어야 한다. 혼자 걸으며 세계의 침묵을 음미해보아야 한다. 대기의 가야금을 울리는 바람과 그 소리에 화답하는 풀과 나뭇잎들의 서걱거리는 소리. 혼자 걸을 때 자연은 우리에게 말하기보다 듣기의 자질을 더 키우게 한다.
뿌리가 없는 두 발은 걸으라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걷을 수 있는 타고난 능력 대신 자동차를 소비할 능력을 키우라고 강요받는다. 운송수단의 발전으로 인간이 걷던 길은 도로로, 걸음걸음이 만들어내던 자기 속도는 바퀴의 비인간적인 속도로 대체되었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단축된 것만큼 빠른 속도에 생활리듬이 강제적으로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걷기는 그런 식의 삶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청량한 가을이다. 대기를 호흡하며 걷자. 숨을 가다듬으며 오직 걸음걸이에만 집중해보자. 마음 내키는 대로 멈추고, 생각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보자. 낯선 사람, 집들, 골목길을 발견하고 불어오는 바람, 들려오는 소리들을 감각하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경험해보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곧 끝이 보이리라. 나는 어디가 끝이든 상관하지 않고 걷고 있다. 걷는 속도는 같다. 빠르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쉬는 법은 없다. 곧 끝이 보일 때가 됐지만, 나는 그 끝을 모른다. 걸음이 멈추고 더 갈 데가 없으면 끝일 것이다. 나는 끝 모르는 길을 걸어가면서 주위에 펼쳐진 색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며 갈 것이다. 나는 오늘도 걷고 또 내일도 걸어갈 것이다.
김건흡 / MDC시니어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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