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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느 가을날 비치에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남의 시선을 의식 않는
자유스러움을 느낀다
잃어버렸던 나를 찾은 기쁨
원시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 됨이랄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코로나로 인한 방콕의 답답함을 풀어보려고 아내와 둘이서 떠났다. 1박 2일 샌디에이고 여행이었다. 대추가 발갛게 익어가는 9월이기는 하나 볕은 아직 따갑고 날씨는 더웠다. 발보아 공원의 넓은 주차장은 한산했다. 공원을 찾는 방문객도 띄엄띄엄했다. 코로나의 위력이 실감 났다.

돌아오는 길은 해안 산책길을 택했다. ‘토리 파인 골프장’ 쪽으로 올라오며 보니 ‘Black’s Beach Trail'이 인터넷 트레일 안내에 소개되어 있었다. 누드 비치로 허가된 곳이나 본인이 원하면 옷을 입어도 된다는 설명이다. 호기심이 일었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고 그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주차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파도타기를 준비하는 젊은 남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절벽이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길은 미끄럽고 위험했다.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내려갔다.

땀을 흠뻑 흘리며 절벽을 타고 내려와 모래사장에 들어섰다. 중년 백인 남자가 벌거벗은 채 몸을 드러내고 지나갔다. 아내는 얼굴이 홍시가 되어 얼른 눈을 돌렸다. 의아해하는 아내에게 여기가 누드 비치라고 말해 주었다. 일부러 이리로 왔느냐며 나에게 짓궂은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저 씩 웃었다.

자기는 모래사장에 내려가지 않겠다며 옆길을 따라 남쪽 비탈길로 빠졌다. 나는 땀을 식히려 바닷물에 들어가겠다며 곧장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해수욕할 계획이 없었기에 수영복도 준비하지 않았고 주머니에 손수건 한 장도 없었다. 난감했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모자를 벗어 모래 위에 얹어 놓고 웃옷부터 벗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팬티를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봤다. 50대 부부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벌거벗은 채 2인용 작은 천막을 치고 있었다.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 남자는 누드로 해변 가까이 젖은 모래사장을 걷고, 또 다른 이는 색안경만 끼고 알몸으로 북쪽으로 걸어갔다.

키가 늘씬한 아가씨 둘이서 햇볕을 즐기러 나왔나 보다. 단발머리를 한 여인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음악을 즐기고 있다.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 있다. 신나는 리듬인지 상체를 들썩거렸다.

다른 이는 긴 머리카락을 등으로 늘어뜨리고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풍만한 육체에 흐르는 곡선이 잔잔한 모래 둔덕과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자연 속의 자연이랄까. 주위 환경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성적 매력, 자극, 음란 같은 단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바다에는 서너 명 남녀가 멱을 감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출렁거릴 때마다 엉덩이가 드러났다. 나는 팬티를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허리 아래는 물속으로 가렸다. 기분이 야릇했다. 물결이 피부에 닿는 감각은 마찬가지일 터인데, 얇은 팬티 한 겹 차이에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공중목욕탕에서는 모두 벗고 있어도 약간 쑥스러울 뿐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나를 가려왔던 것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물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다. 자연 속에 자연인이 된 기분이다.

어쩌다, 누드촌, 누드 모임, 누드 행사 등을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볼 때, 나는 이런 무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음란, 외설, 동성애, 성적 문란 등의 단어가 함께 떠올랐다.

오늘 하루 짧은 시간, 우연한 경험으로 새롭게 눈을 떴다. 삶에 시달리고 머리가 복잡하면 여기라도 달려와서 벗고 싶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스러움. 나 자신과 하나 되는 편안함. 잃어버렸던 나를 찾은 기쁨. 원시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 됨이랄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행동만이 아닌 것 같다. 습관에서, 고집에서, 고정 관념에서,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다. 자기 발견에 접근하는 길일 것 같다. 깊은 수준까지 자기 발견을 이룰 수 있는 일종의 수행은 아닐까.

모래 위에 벌렁 누웠다. 파란 하늘에 갓 태어난 구름 몇 점이 둥실둥실 어울린다. 가슴을 어루만지며 스치는 바람이 한결 부드럽다. 이런저런 생각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흩날려 사라진다. 볕이 따사하다. 그대로 한 줌 모래로 녹아내릴 것 같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기도할 때, 불공드릴 때, 명상할 때 알몸으로 한다면 어떨까. 욕심 없이 순수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드리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주혁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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