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살며 생각하며] 홍 장군에게덮어씌우려는 악의 인센티브

“홍범도는 공산주의 투사 아니냐? 소련 공산당원을 대전 현충원에 묻는 문 씨 미쳤네.” 보수 만화가 윤서인이라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린 홍 장군 유해봉안을 비난한 글이다. 이에 정철승 변호사가 역사적이며 사실적 정의를 전도시키고 대중의 공분을 자아내는 언동을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악의 인센티브를 끊기 위해 그로부터 인당 50만원씩 받아내는 공익소송 수익모델을 창출하자고 제안, 단숨에 1200명이 동조자를 모았다는 보도다.

윤 씨가 홍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깎아내린 이유는 1927년 레닌을 접견한 뒤 권총 한 자루와 금화 100루블, ‘조선대장’이라는 친필서명을 선물로 수령하였다는 일지 내용 때문이다. 장군의 일지에는 머슴살이에 살인 이력, 변성명하고 승려행세를 한 이야기는 물론 “내 처와 아들을 일제가 잡아 글을 모르는 아내를 협박, 남편에게 회유 편지케 하다 고문치사 시켰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또 “4980원으로 30명을 무장케 하는데 2180원이 들었고 탄환 380발을 1100원에 샀다. 비새기 300장에 800원, 남아있는 돈은 내가 한 달 동안 통용했다” 등 금전 출납의 세세 현황과 공금차용에 대한 정직한 내용도 실려있다. 그러나 주제는 일제와 맞붙어 언제 누구와 어디에서 얼마나 많은 일본군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을 격멸시켰는지를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적시함이고 이로 인해 지금도 독자들의 가슴을 후련케 함이다.

그런데 윤 씨는 이런 가슴 뛰는 자발적 투쟁사는 애써 외면한 채 후반부에 잠시 언급된 레닌을 면회한 장면을 침소봉대, 홍 장군이 대단한 빨갱이 인양 혹세무민시켜 답답하고 안타깝다. 1927년 당시 홍 장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로 인해 대일본 공적 1호로 더는 중국 땅에 머물 수 없어 러시아로 건너가 사활을 건 유격활동을 벌일 때다. 그런 그가 몸담은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부름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했어야 옳을까? 당시 공산주의는 이론만 무성했지 좋고싫은지 가치조차 형성되지 않은 혁명 초창기가 아니던가?

1985년 홍콩에서 쪽지 비자를 받아 중국을 방문하면서 지인의 부탁으로 그분의 형님을 북경에서 만난 적 있다. 그분은 일제 말 서울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분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8·15광복은 기쁨인 동시 갈등의 시작점이었다. 왜냐하면 섬겨야 할 조국을 어디로 해야 할지 딜레마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는 북을 택했고 그곳 우국지사가 되어 평양의 환영대회에 참석하면서 김일성으로부터 훈장과 영웅 칭호를받았다.

그가 북쪽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이 친일 재산을 빼앗아 무산계급자들에게 나눠주고 ‘쌀밥에 고깃국을 먹게 하겠다’는 공언으로 이 다짐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동료 문인과 예술인 상당수가 평양을 택했다는 것이다.

88올림픽으로 남한의 위상이 북한과 비견할 수 없던 어느 날, 북경에서 그분을 다시 만났다. 그 어른은 나의 면전에서 벽장 속에 모셔둔 김일성 훈장들을 꺼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김 선생! 내 선택이 잘못이었네.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북한의 꼭두각시로 이용만 당했다네”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20년. 그분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그가 남긴 회한의 눈물은 내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