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식의 신 미국유람]‘노예 해방’ 논란 불 지른 역사적 재판 현장
<19> 세인트루이스 코트하우스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또 하나의 미주리 랜드마크
차별없는 자유인 꿈꿨던 ‘드레드 스콧’ 정신 지금도
유명한 재판이란 ‘드레드 스콧’ 재판을 말한다.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 1858)은 흑인 노예로 1846년 주인이 죽자 주인의 미망인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며 법원에 제소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시 노예는 소유주의 개인 재산으로 헌법에 의해 철저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옛날 한국도 농가의 재산목록 1호였던 소 한 마리를 우시장에서 서로 사고 팔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예도 사 들여 오면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몸종처럼 마음대로 사역을 시킬 수 있었고, 필요가 없어지면 내다 팔면 되는 사유 재산이었다. 따라서 어떤 노예주도 쉽게 노예를 그냥 해방시켜 주지는 않았다.
스콧의 노예해방 요구는 그런 재산권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십 수년간 재판이 진행되면서 전국적인 관심과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결과는 스콧의 패배였다. 처음 소송을 제기하고 10년도 더 지난1857년, 당시 로저 테니 연방대법원장이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연방 법원에 소송할 권리도 없다”는 유명한 판결문으로 최종 판결을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나 동물로 취급한 것인데 참고로 로저 테니 대법원장 역시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노예주였다.
연방대법원의 이 판결은 남북전쟁 후 수정헌법 14조 통과로 무효가 됐으나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지금도 회자된다. 그리고 당시 링컨은 드레드 스콧 재판의 비도덕성을 공격해 전국적인 논객으로 부상했고 그 여세를 몰아 1860년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됐다.
이 판결은 남북전쟁을 앞당기게 한 단초를 만들기도 했는데 북부에서는 흑인 노예 해방을, 남부에서는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남북 대결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도화선이 됐다. 작은 쥐 구멍 하나가 큰 댐을 무너뜨린다고 무슨 사건이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일이 나중에는 속수무책이 되는 경험을 어디 한두 번 보았던가.
원래 드레드 스콧은 버지니아에서 출생해 군의관인 존 에머슨의 노예로 이곳 미주리주로 팔려왔다. 이후 1834년 주인을 따라 일리노이주로 이주하였고 1836년 위스콘신주로 다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주인의 허락으로 결혼도 했다. 그 후 1838년 주인을 따라 가족과 함께 다시 미주리주로 귀향했다가 주인인 애머슨이 죽자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변호사의 회유에 애머슨의 미망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자유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드레드 스콧 재판은 지지부진 시간을 끌다가 1857년에야 종결됐다. 하지만 정작 소송 당사자인 스콧은 혹독하고 힘든 노예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최종 판결 1년 전에 죽고 말았다.
지금 아시안들이 그나마 덜 차별받고 미국에서 당당히 살 수 있는 것도 드레드 스콧 같은 이들의 고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여행 메모
지난 주 소개한 게이트웨이 아치에 올라 서쪽 창으로 내려다보면 코트하우스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세인트루이스에는 그밖에도 명문 야구팀 카디널스 홈 구장 부쉬스타디움, 풋볼팀 램스의 홈구장 에드워드 존스돔도 가볼만한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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