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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장진호 노병을 만나러 가는 길

8월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만물이 한창 여물어갈 시간이다. 태양을 끌어안고 있는 한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책상을 정리했다. 어느새 1년의 절반이나 훅 지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고 싶었다. 학창시절 책상 앞에 앉아서 서랍 속 정리하느라 정작 해야 했던 시험공부는 뒷전이었던 버릇은 여전하다. 그래도 새 일을 시작하려면 책상정리는 필수다.

지난달은 계획했던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해서 끼니를 챙기는 일도 귀찮았다. 불량 엄마라고 낙인인 찍힌 지 이미 오래지만 밥 때가 되면 ‘오늘 반찬은 뭐냐’고 묻는 식구들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오늘 저녁, 라면 먹으면 안 될까.

몰입에 깊어지는 만큼 책상 위는 점점 더 어질러져만 갔다. 키보드 주변으로 문구용품 뿐만 아니라 매니큐어, 핸드크림도 제자리를 못 찾고 쌓여갔다. 희한한 것은 잡다한 물건들 틈 사이로 클립을 찾아내고 스테이플이 놓인 자리는 용케도 기억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깨끗이 치워 놓으면 나중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서랍을 홀랑 뒤집은 적도 많다.

뒤죽박죽 늘어진 물건 틈을 비집고 작업을 하는 내 모습이 보기에 딱했는지 작은딸이 손목에 좋은 키보드라며 불쑥 내밀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설치할 때가 아니다. 하던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말에 딸이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키보드를 교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박자박 쌓여간 문구용품들도 같이 치워야 할 것 같아서다. 그것들을 정리하다보면 흐름이 깨질 것 같다며 딸을 겨우 이해시켜 한 달이 지나서야 키보드를 갈아 끼웠다.

먼지를 닦고 한 두 개씩 꺼내다 수북하게 쌓인 펜들을 한 곳에 모았다. 나무판도 닦고 컴퓨터 본체에 쌓인 먼지도 닦았다. 그래봐야 또 며칠 못 가서 종이 파지와 연필, 무심코 올려놓은 컵으로 책상 위는 또 다시 엉망이 될 테지만 말끔히 치웠다.

새로 바꾼 키보드는 기존의 형태와는 다르게 생겨서 손가락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다. 키보드 구조가 익숙하지 않으니 예전에 쓰던 키보드가 아쉬웠다. 반품하고 싶었지만 일주일만 버텨보라는 딸의 충고에 나는 내 몸을 키보드에 적응시켜야 했다. 그런데 새 키보드에 F8을 눌러도 맞춤법 팝업이 뜨질 않았다. 역시 염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시합 전에는 머리도 안 감는다는 어느 운동선수처럼 나도 작업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아무리 어수선해도 책상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의식을 치르듯 청소를 하는 이유는 조만간 미주리주 스프링필드에 갈 예정이다. 8월말에 장진호전투에 참가했던 미군들이 마지막으로 모임을 갖는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그 모임 회장을 비롯해서 여러 분들이 돌아가셨다. 노병들의 연세를 고려한다면 앞으로의 모임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는 판단인 모양이다.

그 추운 겨울, 전우들은 죽고 장진호전투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겪었을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보답하고 위로를 해야 할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에서 보내온 마스크들을 가방에 챙겼다.

삭발한 머리처럼 깨끗해진 책상에 앉아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인류애를 묵상한다.


권소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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