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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사색] 이런 인물이 있었기에

8월은 세계사적으로 정치질서에서의 변환점을 이루는 사건들이 있는 달이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가 막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런 정치현상이 발생하기 까지 지배받던 국가의 무수한 인물들이 독립은 물론, 자유와 평화에 대한 목숨 건 운동이 있었다. 다 언급 할 수는 없으나, 기억날 만큼 평화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인도의 간디가 있다.

간디는 1869년 인도의 포르반다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정식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다. 일명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라 하기도 하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 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지어 주었다. 그리고 “카람찬드”는 간디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두 합하여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된 것이다.

간디가 출생한 1869년의 역사적 사건중의 하나는 스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는 것이다. 운하가 건설되기 전 동양에서 유럽으로 물자를 싣고 가려면 인도양 서남쪽을 거쳐 남 아프리카 공화국을 돌아 유럽까지 가야 했었는데, 운하로 말미암아 식민지에서 걷어들인 많은 량의 물품들을 시간과 운송비를 줄여 본국으로 쉽게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당시 운하는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통치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간디가 태어 난 것이다.

간디는 7살때 약혼을 했다. 약혼녀가 연이어 사망하여 세번째 약혼을 하게 되고, 13세때 같은 13세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생활 가운데 크게 뉘우치는 일 하나를 하게 된다. 그것은, 신혼 초 아내와의 가정생활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보지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후, 비록 말년에는 여러 설에 휘말려지게 되었지만, 늘 금욕주의의 생활을 하고자 하며 살았다.

간디는 영국에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영국에서 유학생활 하는 중에 아내와는 편지 한장 서로 주고받지 못했다 한다. 그 부인은 문맹인이었고, 공부하는데는 타고 날 만큼 싫어하고 관심이 없어서 글을 쓸줄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당시 대영제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 변호사였지만, 인도내에서 공부한 변호사들과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어서, 대신 인도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 부터 천대받던 인도인들의 권리와 권익향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 자신이 남아프리카에 변호업무 로 출장 중, 기차 1등칸 표를 구매했으나 3등칸으로 쫓겨났던 경험은 잘 알려져 있는 일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조건으로 전쟁에 참여 할 것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특별법인 로랫법 (Law of Rowlatt / 영국판사/감시와 처벌) 을 제정하여 반영 저항을 하는 인도인들을 엄하게 다스려 나갔다.

간디는 지배하는 통치자들의 각 종 법규 준칙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는데, 그 운동을 비폭력 평화주의로 했다. 폭력은 정의롭지도 못하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아 그런 방법을 써 봐야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인도나 영국은 물론 밖앗 세계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세계 여론은 인도와 간디의 비폭력 저항 독립운동 정신을 지지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1947년 8월 영국식민통치로 부터 독립되었으나, 그 과정에 인도 내 잠재되어 산발적으로 일어 났던 종교간 갈등이 폭발되어 국가 내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다수인 인도 힌두교도들은 소수인 이슬람 모슬렘들을 종교적 증오심으로 차별하고 박해하였다. 당시, 힌두교도들과 모슬렘 쌍방간의 폭력은 심각 할 정도로 난무했다.

간디는 이 두 종교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 중단 및 화해를 시도했다. 그는 자신이 힌두교도임을 스스로 선언 했지만, 기독교의 성경도 읽어, 특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심취했고, 모슬렘 경전도 읽으므로 타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 하지만, 힌두교도로서 모슬렘 또한 지지한다는 이유로 극우적 힌두교도에 의해 1948년 1월에 암살 당하고 만다.

당시, 간디의 죽음에 대해 네루는 “우리(인도)의 삶에서 빛이 사라졌다” 라 말했고, 미국의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는 “신약성서 예수의 가르침 대로 적을 사랑하려 하였으며 자신을 경멸하려드는 사람들을 선으로 대하였다” 라 평했다.

한마디로, 그의 비폭력저항 정신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즉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정신으로 부터 온 것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 정신을 현실적 삶에 적용하며 살다 희생당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교훈을 간디가 받아 들이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미국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이어 받아 미국 민권운동을 평화주의로 주도해 나간 역사가 있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가 평화스런 분위기 속에서 삶을 살 수 있는 것에는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아니 더 근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평화주의가 근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의 정신을 위대하게 보게 된다.



장석민 목사 / 빛과 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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