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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신군부 지지 압박에 LA서 3년간 도피 생활

조계종 개혁 상징 월주스님 26일 다비식

조계종 1728대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 스님이 지난 22일(한국시간) 전북 김제 금산사 에서 입적했다. 월주 스님은 LA에도 정기적으로 방문해 반야사에서 법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조계종 1728대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 스님이 지난 22일(한국시간) 전북 김제 금산사 에서 입적했다. 월주 스님은 LA에도 정기적으로 방문해 반야사에서 법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스님 영결식이 열린 26일 전북 김제 금산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진행되고 있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스님 영결식이 열린 26일 전북 김제 금산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진행되고 있다.

80·94년 두 차례 조계종 총무원장
전두환 신군부 맞서다 미국 유배도
유배 시절 LA 반야사에서 머물러
불교 자주화, 종단 민주화 틀 세워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도 이끌어
"어두운 시대 속 옳은 소리 많이 해"


"진영 논리로 갈라진 한국사회에는 내가 옳으면 남도 옳고 남이 틀리면 나도 틀리다는 화쟁 사상이 필요하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을 두 차례 역임하고 지구촌공생회 등을 통해 대사회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월주스님이 생전에 던진 말이다.

월주스님의 영결식이 26일(한국시간) 전북 김제 금산사 처영문화기념관에서 엄수됐다.



그는 지난 22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7세 세수 87세.

올해 폐렴 등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던 고인은 이날 새벽 조실로 있는 금산사로 옮겨진 뒤 눈을 감았다.

월주 스님은 1980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제17대 제28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고인의 개인사는 조계종단의 개혁사와 맥을 같이한다. 고인은 1980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그해 10월 신군부에 의해 10ㆍ27법란이 발생했다. 신군부는 그에게 종단 명의로 전두환 지지 성명을 내라고 했다.

종단 명의로 낼 것을 거부하자 이번에는 '총무원장 송월주' 명의로 내라고 했다. 이번에도 거부했더니 서빙고 보안실로 데리고 갔다. 월주 스님은 거기서 23일간 고초를 겪었다. 당시 신군부에 비협조적인 조계종단의 와해를 노린 작전명이 '45계획'이었다. 조계사의 주소가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월주 스님은 미국으로 3년간 유배 생활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1994년 12월 꼬박 14년 만에 다시 총무원장이 됐다. 조계종이 정치승에 의한 장기 집권 음모로 몸살을 앓을 때였다. 종단의 개혁세력이 월주 스님을 지지했다. 고인은 불교 자주화 종단 운영 민주화 등을 앞세우며 '깨사(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전개했다. 또 총무원장 3선 금지 제도를 마련해 정치승에 의한 장기집권 시도를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조계종단에서는 당시 체제를 '개혁 종단'이라 부른다. 그 중심에 월주 스님이 있었다. 지금도 "조계종단사는 송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조계종의 개혁사에서 고인은 큰 역할을 했다.

월주 스님은 불교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개신교의 강원용 목사와 함께 고인은 '종교 지도자 삼총사'로 불리었다. 생전에 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세 사람 중 누구도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다"며 "그렇지 못할 때 종교는 국민과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고 회고한 바 있다. 월주 스님은 이들과 20년 가까이 친분을 나누며 우리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의논하며 사회적 목소리를 냈다.

월주 스님은 1998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깨사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경실련과 불교인권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국제구호 NGO '지구촌 공생회'와 함께일하는재단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 등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캄보디아를 비롯한 빈곤 국가 5개국에 2000개가 훨씬 넘는 우물을 팠고 네팔과 라오스 등 8개국에서 60개가 넘는 학교를 준공했다.

생전에 월주 스님에게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물은 적이 있다. 월주 스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만족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며 "나는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월주 스님은 또 수행과 자비를 둘로 나누지 않았다. "수행을 하면서 자비를 베풀고 자비행을 하면서 또 수행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걸 자신의 삶으로 몸소 보여주었다.

월주스님은 미주 한인 불교계와도 인연이 깊다. 1980년대 미국으로 유배 생활을 떠났을 때 LA지역 반야사에서 3년간 머무르기도 했다.

월주스님이 설립한 지구촌공생회는 미주 지역에도 지부가 있다.

지구촌공생회 미주지부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반야사 주지인 현철스님은 "월주스님은 2년에 한번씩 미국에 오셔서 반야사에서 법회도 많이 하셨다"며 "함께 반야사에 있으면서 산책도 자주 했다.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신 분이다. 반야사에서는 25일 추도식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IBS 불교대학 학장인 종매스님은 "미주 지역 불자들에게는 참 친숙한 분"이라며 "월주스님은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 옳은 소리를 많이 하셨다. 사회활동을 통해 일반인에게도 많은 울림을 주신 스님"이라고 회상했다.

한편 월주스님은 월주스님은 불교의 대사회 운동에 매진했던 불교계 큰 어른이다. 조계종 원로의원 경실련 공동대표 나눔의집 이사장 우리민족서로돕기 대표 등을 역임했다. 여러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모란장을 수훈하고 만해대상.대원상 등도 수상했다.


백성호·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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