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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10> ‘미-한 [변형]사전’ 펴낸 의사 이원택 선생

“우리말 지키려 6년 걸려 영어사전 새로 썼다”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 뿌리째 들춰 본 어근 사전”이다.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 뿌리째 들춰 본 어근 사전”이다.

애틀랜타를 방문한 이원택 선생. 스와니 친구 집에서 직접 고기를 굽고 있다.

애틀랜타를 방문한 이원택 선생. 스와니 친구 집에서 직접 고기를 굽고 있다.

사전 내지. 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을 매긴 것이 특이하다. 3만여 단어를 수록하느라 글자가 깨알만큼 작아졌다.

사전 내지. 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을 매긴 것이 특이하다. 3만여 단어를 수록하느라 글자가 깨알만큼 작아졌다.

노인정신과 전문의로 환갑 지나 ‘늦깎이 문학 인생’
표제어 3만 여개…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 매겨
단순 뜻풀이 넘어 백과사전 잡학 정보로 읽는 재미


#.
안 그러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선입견을 가질 때가 있다. 직업 따라 교수는 어떻고, 사업가는 어떻고, 종교인은 또 어떨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이 그것이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만남이 이어지면 그런 생각이 정말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원택 선생도 그렇다. 볼 때마다 선생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면서 그 깊이의 끝이 어디인지를 가늠키 어려운 분이구나 생각하곤 한다. 올해 만 74세. 남가주 롱비치에서 노인정신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의사다. LA 한인사회에선 꽤 유명한 문인이기도 하다. 그런 선생이 지난 4월 애틀랜타에 왔다며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바람도 쏘일 겸 자동차 빌려 대서양 연안을 훑어 내리던 중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선생을 안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의 글과 책을 즐겨 읽었고, 가끔 만나 문학과 세상을 얘기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선생의 박학다식과 유머가 좋았다. 그 나이, 그 직업 사람들이 가질 법한 권위 의식이나 허위, 가식이 전혀 없다는 것도 15년의 나이 차를 뛰어 넘어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유였다.

연락을 받고 바로 스와니에 있는 선생의 고교 동창 친구분 집으로 달려가 선생을 만났다. 옛 벗을 맞은 친구의 대접이 곁에서 보기에도 극진했다. 나도 모처럼 어울려 문학과 역사, 자연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그날 선생이 방금 나온 것이라며 놀라운 책을 한 권 건넸다. 1236쪽. 한손에 들기도 버거운 묵직한 영어 사전이었다. 편저자는 바로 이원택 선생 자신이었다. 워낙 대단했던 선생의 집필력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받아들고는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졌다.

6년이나 걸려 썼다는 책의 제목은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지식과 감성#, 2021년 4월 19일 초판 1쇄 발행)이다. 속어, 신조어를 포함해 표제어만 3만2000여개. 그 중 2만 여개는 기존 영한사전에서 골랐고 나머지 1만 개는 미국 신문, 잡지, 교과서, 상품, 광고 등에서 찾아 채웠다고 했다.

겉표지에 새겨진 ‘뭐, 이런 사전이 다 있어?’라는 문구가 이 사전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질문을 안 던질 수 없었다. 그날 묻고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 원격으로 주고받은 선생과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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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사전을 만들 생각을 했나.
“취미로 문학을 하다 보니 영·한 사전을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기존 사전들이 단어 원래의 맛이나 느낌을 살리지 못한 번역으로 ‘죽은 사전’사전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참에 새로 한 번 써보자 싶었다. 46년간 이민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 사는 또는 미국으로 이민 올 한국인들을 위해 제대로 된 ‘미국어’ 사전을 만들어 보자는 게 시작이었다.”

- 영어 좀 한다는 분들은 번역서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들 하는 것 같다. 집필에 앞서 좀 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을 텐데.
“처음엔 소설 사전을 써 보려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21세기 미국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쓰는 단어들의 어원을 추적하고 파생어별로 정렬해서 소설식으로 풀이해 이 사전을 만들었다. 70여년을 살면서 섭렵했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뜻풀이도 새로 했다. 보통 한국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 발음, 한글 해석, 대체 한글, 한국어 처방도 표기했다. 영어에 밀려나고 있는 한국어를 살려냈으면 하는 것이 내심 목표였다.”

- 뜻이 고상하다. 기존 사전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
“기존 사전의 틀에서 잡소리는 싹 다 뺐다. 표제어가 많거나 설명이 길다고 다 좋은 사전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전들은 99% 모방에 1% 창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전은 95% 모방에 창작이 5% 쯤은 된다고 자부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수록된 각 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을 매긴 것이다. 한국말로 쓸 수 있는데도 굳이 영어로 표현하는 폐단을 막아보자는 충정에서였다.”

- 수우미양가 등급이라니, 무슨 말인가?
“영어는 외국어다. 가능한 한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로 쓰는 게 맞다. 그런 취지에서 수록 단어마다 한국말로 대체 가능한 정도 따라 구분해 등급을 매긴 것이다. ‘수’는 한국어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단어, ‘우’는 한국어 번역은 됐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단어, ‘미’는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은 말이지만 이미 한국어로 자리 잡았거나 국제 감각을 살릴 수 있는 단어다. ‘양’은 좋은 한국어가 있음에도 과시용으로 흔히 쓰는 단어에 붙였고, ‘가’는 한국어를 파괴할 수 있는 말로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할 단어다.등급을 정하는 게 정말 머리가 아팠다. 그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진 것 같다.”

- 대단한 열정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클릭 한 두 번이면 온갖 영어 사전이 다 뜨는데 누가 이런 걸 본다고 6년씩이나 시간 들이고 돈까지 들여 이런 사전 펴낼 생각을 했나?
“100년 전에 쓰인 독립선언문 중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이 반도 안 된다. 요즘 한국 대중 매체에 나오는 말도 열에 한 두 마디는 다 영어다. 특히 연예, 스포츠, 광고, 상호, 상품명은 영어가 40~50%에 이른다. 이러다간 100년 후엔 아예 한국말은 사라지고 영문에 토씨나 어찌씨만 딸린 영문 이두문자가 판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비극을 막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 엄청난 분량의 원고였을 텐데 출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정말 그랬다. 시장성을 먼저 따져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이런 사전을 만들겠다고 나서 줄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좋은 출판사를 만나 작업을 마쳤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왕 책이 나왔으니 한국의 영문과 대학생이나 중고교 영어 선생님들이 많이 봐 주면 좋겠다. 매일 영어를 접하며 사는 미주 한인들도 본다면 백과사전 읽듯이 재미가 있을 거다.”

- 책이 나온 지 석 달 쯤 됐다. 찾는 사람은 좀 있는지?
“초판 4000부를 찍었는데 요즘 종이 사전을 사 보는 사람이 없어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다. 한국의 산간벽지에 근무하는 영어 선생님들에게 기증이라도 할까 하고 알아봤는데 받아주겠다는 데가 없어 그것도 쉽지 않았다. 까딱하다간 비싼 책 수천 권이 폐기 위기에 처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네스코에도 문의했다. 무슨 구호품이나 되는 줄 알고 북한에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광고 시장도 알아봤는데 배보다 배꼽이 커서 그것도 고민이다. 그나마 최근 한국의 한 신문에 소개가 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현재 교보문고 외국어 서적 부문 판매 순위에서 꽤 상위에 올라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 의사 일도 바쁠 텐데 어떻게 집필 시간을 냈나?
“어릴 적 꿈이 소설가였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며 자라다 보니 돈도 중요했다. 그래서 의사가 됐다. 100세 시대가 온다는 걸 진작 예측하고 노인정신과로 방향을 잡았지만 노인들은 병원에 몇 번 오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30년 의사 일을 하면서 좀 먹고는 살 만해졌다. 환갑 지나고부터는 그동안 못했던 작가의 길을 다시 가보자 마음을 먹었다. 글 쓰는 게 즐겁다. 좋아하는 일인데 왜 시간을 못내겠나.”

선생은 말 그대로 늦깎이 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2010년 ‘문학예술’에서 수필로, 2년 뒤 ‘한국문인’에서 시로, 또 3년 뒤인 2015년엔 ‘미래시학’에서 평론으로 내리 등단을 했다. 이후 ‘만화경’ ‘신비경’ 등 ‘경’자 돌림 작품집 6권을 잇따라 냈다.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론을 설파한 ‘Meta writing’이라는 책도 있다.

- 말씀을 들어보니 이번에 나온 사전은 우리말 지키기를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 같다. 개인 저서 차원을 넘어 이민자로서 한인 이민사회의 성과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봐 주니 감사하다. 하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 부족한 것도 있고 더 보태고 싶은 것이 또 생겼다. 곧 개정증보판을 펴낼까 한다. 이번에는 단어의 뿌리를 좀 더 연구해 ‘어원사전’이 되도록 해 볼 생각이다. 기대해 달라.”

#.
선생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게 4월. 벌써 석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 수시로 들춰보고 있다. 사전 읽기가 원래 그렇듯 지루한 듯 재미있고,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한 번 시작하면 잘 손을 떼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데 이 사전이 정말 그렇다. 콩글리시 모음, 전산망 약자 등 알아두면 재미있는 것들로 채워진 부록 뒤적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리 유튜브나 동영상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유행을 거스르는 대작 종이 책 한 권쯤은 소장해 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그런 일에 뜻을 세워 몇 년씩 열과 성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응원할 수 있는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인사회, 나아가 한국 문화 전체의 지평은 그렇게해서 넓어지는 게 아닐까.

책은 한국의 주요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미주에선 LA 반디서점(213-389-8885)이나 웹사이트 Bandibookus.com에서 구할 수 있다. 35달러. 한국 정가는 35000원이다.

이원택 선생은…
1947년 경기도 파주 출생. 노인정신과 전문의.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육군 대위 전역 후 1975년 미국에 왔다. 1980년 남가주 롱비치에서 개업,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 수필, 평론 부문에서 잇따라 등단,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2015년 한미번역문학가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역임했고 2018년엔 시로 미주펜문학상을 받았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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