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어느날 오후 산책길에서

계절을 따라 걷는 발걸음 속에 낯 설었던 지난 시간들이 발끝에 감겨온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로 이사온 후 처음 산책길이었다. 길도 익히고 동네 분위기도 살필 겸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한 시간내의 가능한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 지금은 공터가 하나도 없이 잘 짜여진 동네가 형성 되었지만 30년 전 이곳은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 길에 오랜 나무와 숲이 우거진 미개발 지역이었다. 그 당시 모델하우스로 지어논 집을 구입했으니 그 주변은 터만 닦아 놓았을 뿐 그야말로 집들은 몇 채 되지 않았다. 빗물을 모아두는 작은 호수 세 곳과 북쪽으로 아주 큰 호수를 찿을 수 있어 좋았다. 호숫가를 걸으며 갈대숲의 출렁임을 보았다. 호수의 작은 파장과 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동쪽으로 차도를 건너 언덕으로 오르는 작은 언덕을 발견하였는데 이 언덕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진 walking trail은 그야말로 산책길로 손색 없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이며 수북한 들꽃, 구릉을 따라 휘어진 이 길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소중한 산책길이 되고 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언덕길을 오르며 차가운 손을 부비기도 하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는 따스한 봄날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쉬어가기도 했다. 산책 중에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옷으로 먼 거리를 뛰어 집으로 돌아온 날도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얼굴을 그을리는 날이 태반이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두 팔 벌린 눈사람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는 집보다 먼저 이 언덕을 오르기도 하였다. 오랜 시간 살았어도 여전히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서러움에 푸념도 하고, 위로도 받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이 언덕의 정상에서 두 팔을 펴고 하늘을 향한 깊은 호흡을 할 때면 상한 마음이 어루만져 지고 다시 살아야 할 의미와 용기를 얻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시인, 화가)
시간은 흐르는데
네가 보이지 않는다
간혹 흐트러져
안개처럼 몽롱하게
오후는 사라졌다
정오의 햇살은 각을 세우고
그늘은 반경을 좁혀 오는데
그림자처럼 지나치는 오후
빛을 잃어 버린 낮 달이
물구머니 내려다 보는 언덕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
땅거미가 개미처럼 슬금슬금
기어가는 오후 내내
네가 보고 싶어 사라진
그림자처럼 나를 찾았다
아무도 묻지 않는 나를
지난 30년의 시간을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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