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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어느날 오후 산책길에서

비가 잠깐 뿌리고 지나간 후 산책길은 푸르고 청명하다. 깊게 들이마신 공기가 온 몸을 상쾌하게 정화한다. 길가 잔디도 눈에 띄게 초록빛이다. 지나가는 발걸음 위로 물기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구슬 같은 물방울을 굴려 내 머리 위로 떨어뜨린다. 수그렸던 들꽃들이 머리를 들고 바람에 살랑이며 서로의 얼굴을 부빈다. 나는 풍경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정물이 된다. 나만 살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정체된 시간 속에 미세한 움직임으로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하늘의 구름도, 땅 위의 나무와 풀과 꽃들도 이젠 친구처럼 내 어깨를 스치고, 속으로 속으로 속삭이듯 담겨져 온다. 숲 속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토끼와 사슴과 들쥐들의 눈동자들이 위 아래로 혹은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땅 속 곤충들과 벌레들의 움직임 또한 조용하지만 규칙적으로,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가 물려 돌아가는 소리같이 리드미컬하게 내 귀에 얹어져 온다.

계절을 따라 걷는 발걸음 속에 낯 설었던 지난 시간들이 발끝에 감겨온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로 이사온 후 처음 산책길이었다. 길도 익히고 동네 분위기도 살필 겸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한 시간내의 가능한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 지금은 공터가 하나도 없이 잘 짜여진 동네가 형성 되었지만 30년 전 이곳은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 길에 오랜 나무와 숲이 우거진 미개발 지역이었다. 그 당시 모델하우스로 지어논 집을 구입했으니 그 주변은 터만 닦아 놓았을 뿐 그야말로 집들은 몇 채 되지 않았다. 빗물을 모아두는 작은 호수 세 곳과 북쪽으로 아주 큰 호수를 찿을 수 있어 좋았다. 호숫가를 걸으며 갈대숲의 출렁임을 보았다. 호수의 작은 파장과 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동쪽으로 차도를 건너 언덕으로 오르는 작은 언덕을 발견하였는데 이 언덕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진 walking trail은 그야말로 산책길로 손색 없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이며 수북한 들꽃, 구릉을 따라 휘어진 이 길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소중한 산책길이 되고 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언덕길을 오르며 차가운 손을 부비기도 하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는 따스한 봄날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쉬어가기도 했다. 산책 중에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옷으로 먼 거리를 뛰어 집으로 돌아온 날도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얼굴을 그을리는 날이 태반이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두 팔 벌린 눈사람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는 집보다 먼저 이 언덕을 오르기도 하였다. 오랜 시간 살았어도 여전히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서러움에 푸념도 하고, 위로도 받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이 언덕의 정상에서 두 팔을 펴고 하늘을 향한 깊은 호흡을 할 때면 상한 마음이 어루만져 지고 다시 살아야 할 의미와 용기를 얻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시인, 화가)

시간은 흐르는데
네가 보이지 않는다
간혹 흐트러져
안개처럼 몽롱하게
오후는 사라졌다

정오의 햇살은 각을 세우고
그늘은 반경을 좁혀 오는데
그림자처럼 지나치는 오후
빛을 잃어 버린 낮 달이
물구머니 내려다 보는 언덕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

땅거미가 개미처럼 슬금슬금
기어가는 오후 내내
네가 보고 싶어 사라진
그림자처럼 나를 찾았다
아무도 묻지 않는 나를
지난 30년의 시간을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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