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보고 싶은 ‘미국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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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나의 삶에서 큰 선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1970년에 만난 호프 화이팅(Hope C. Whiting) 여사라고 말하겠다.
미국에 처음 온 내게 영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삶의 예절을 가르쳐준 화이팅 여사.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트리에 불이 켜지 듯 기억난다.
1970년 7월,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나는 만사에 서툴러 겁이 많았다. 미니스커트에 갈래 머리를 땋고 편지를 가지러 우체통 앞으로 나오면 혹여 집배원이 말을 걸까 봐 우편함 뒤에 숨을 정도였다.
103호에 사는 화이팅 여사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나이도 우리 엄마쯤 되어 보이고 잘생긴 얼굴에 몸도 여느 여자들보다 컸다. 나는 101호에 살면서 103호 앞을 지나다녔다.
어느 날 화이팅 여사는 나를 불러 세웠다.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느냐 자세히 물었다. 짧은 영어로 진땀을 흘리며 한 대답을 그녀는 다 알아듣기는 했을까.
그녀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올림픽 지점장이라고 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금은 병가를 내서 가료 중이라고 했다. 회복하면 다시 은행으로 복귀할 거라고 퇴근하고 돌아 온 남편에게 말해주었다.
그분이 다리를 다쳐 집에서 가료 중이던 그 몇 달이 나에게 축복이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남편이 출근하면 나는 매일 103호로 갔다. 어느 날은 재봉 얘기를 하고 어떤 날은 음식 얘기를 하면서 단어와 회화를 동시에 배웠다. 실, 가위, 옷감, 바늘 등의 정확한 발음을 배우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쌀(rice)과 머릿속에 있는 이(lice) 발음 때문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나는 분명 밥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분이 놀라던 모습을 기억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배꼽을 쥔다. R 발음과 L 발음 때문에 한동안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긴장했다.
어느 날은 헝겊으로 식탁보를 만드는 데 이븐(even)이라는 말뜻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똑바로 박음질하라는 뜻인 줄 나중에야 알았다. 음식을 가르칠 때도 생강과 파슬리 발음이 어려웠는데 그녀의 정확한 발음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새 화이팅 여사는 내 영어 가정교사가 되어 있었고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숙제도 내주었다. 앞치마에 주머니 두 개를 만들어 10개의 단어를 적어 넣고 다 외우면 다른 주머니로 옮기고 또 다른 단어를 외웠다.
어느덧 그해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그녀의 집 창문가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밑에는 부모, 형제, 친척, 친구에게 나누어 줄 선물이 멋지게 포장되어 놓여 있었다. 잡지나 영화에서 보았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랍고 감동스러웠다.
그 풍성한 아름다움이라니. 트리 밑에는 선물이 많았는데 내 이름을 붙인 선물도 있었다. 받고 보니 예쁜 유리그릇이었다. 아니,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정말 예뻤다.
시어머님께 요리를 배운 후론 잡채, 불고기, 갈비, 만두를 한 가지씩 해 가서 음식 만든 과정을 설명하면 잘못된 발음과 말을 고쳐주었다. 그때 서양음식 만드는 것도 배웠다. 스파게티, 미트 로프, 라자니아….
새해가 되었고 화이팅 여사의 다리가 회복되었다. 나는 2월에 첫 아기를 임신하고 힘들어했다. 그럴 때도 중단하지 않고 자기 차에 태우고 운전하고 가면서 간판을 보고 읽으라고 했다. 그때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정확한 발음으로 고쳐주었다. ‘랄프’ 마켓이라고 하면 ‘랠프스’ 마켓이라고 고쳐주고 ‘버몬트’라고 하면 ‘붤만트’라고 고쳐주었다. 정말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이었다. 아직도 발음이 잘 안 되는 ‘몽고메리(Montgomery)’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지만.
1971년 11월 첫 딸 패티가 태어나고 다음 해 2월에 친정엄마가 한국에서 오시면서 근처의 방 2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1972년 11월 딸 돌잔치에 화이팅 여사도 왔다. 그 후 한 번 더 거리가 좀 떨어진 곳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분도 이사를 갔다. 그 후 우리는 더 만나지 못했다. 우리 엄마랑 나이가 같아서 미국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인연은 1970년 7월에 만나 1973년 초까지였다. 더는 만나지 못했으니 30개월의 추억으로 끝났다.
지금도 큰딸 돌 사진 속에 있는 화이팅 여사를 보면 어려운 미국 생활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도록 미국 예절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며 친구와 영어 선생이 되어준 보고 싶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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