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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장에서] 소심이 뉴욕 이민기 (2)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영어’를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며 매일을 시작했다. 1985년, 퀸즈 뉴타운 하이스쿨에서의 ESL 교사 첫날, 준비해간 ‘각본’대로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교적 안전한 학교라는 데도, 교실 창밖으로는 갱단에게 폭행당하는 애가 보였고, 학생 칼에 찔린 교사도 있어, 늘 교실 문을 잠그고 수업해야 했다. 덩치가 산만 한 아이들에게 몇 학년이냐고 하면 너는 몇 학년이냐고 되물었다. 교사와 임신한 학생들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에 타면 학생인 줄 알고 눈총을 받을 정도로, 앳되고 조그만 이 동양 여자가 드센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니 쉽지 않았다. 훈육주임에게 보내는 핑크 카드를 애들이 볼 수 있도록 주머니에 꽂고 수업을 했다. 목이 쉬어 집에 오는 날도 잦았다.

89년 1월, 포트리 고등학교로 옮기고 나니, 그제야 미국 고등학교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 여유롭고 안정된 교육 환경에서 음악, 연극, 악기,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마음껏 고등학교 시절을 즐기다 대학에 가는 아이들을 보니, 한국에서 오직 공부만 하는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남편도 뉴저지 서부에서 섬기던 교회를 떠나 이쪽에 ‘한무리 교회’를 막 개척했을 때였다. 두 아이를 기르며, 고등학교 교사와 이민교회 목사 사모로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이민의 여름 시즌이 시작되었다.

늘 시간이 모자랐다. 새벽기도로 시작한 하루는 종종 밤늦게 교우를 심방하고 돌아와야 끝이 났다. 돌아와 이미 잠들어있는 아이들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아이들과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눈 채 지나가 버린 하루가 서러워 눈물이 났다. 소심하고 예민한 내게 이민 목회는 너무도 힘들었다. 바쁜 일과와 피곤한 몸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온 마음으로 사랑해도 이런저런 말들을 하며 교회를 떠나는 교우들로 인한 상처는, 아물만하면 다시 나를 후벼 파 목회 시절 내내 아프게 했다.

목회가 힘들 때면, 완벽주의 남편은 집에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마치 한껏 잡아당겨 놓은 고무줄처럼 팽팽하고 예민했다. 그의 긴장을 풀어주고 웃게 해주는 것도, 커가는 아이들 활동 뒷바라지도, 함께 사는 시어머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일도 다 내 몫이었다. 감당해야 할 무게가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면, 공원에 나가 한없이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그냥 지구 밖으로까지 걸어나가고 싶은 적도 많았던 그 어려웠던 날들.



그렇다고 나의 이민의 여름 시즌이 늘 뜨겁고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시원한 그늘 같은 순간도 많았다. 바쁜 아빠 엄마를 봐주기라도 하듯, 할머니 사랑 가운데 무탈하게 잘 커 준 두 아들은, 자라면서 크고 작은 기쁨의 열매들을 아주 많이 맺어주었다. 든든한 두 그루 나무 같은 아이들 곁에서 우리는 쉼을 얻었고 많이 행복했다. 또한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들과의 교제와 그들의 깊은 사랑은, 고단한 이민 목회 현장에서 오아시스처럼 시원했고 위로가 되었다.

수학은 잘하지만, 영어로 된 용어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위해 ‘수학 용어사전’이라는 책을 한국 출판사를 통해 출판한 일, 신문 칼럼과 세미나들을 통해 학부모들에게 미국 학교와 자녀 교육에 대해 도움을 준 것도 큰 보람이었다. 남편의 집회나 선교지 방문을 위해 동행한 여러 나라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들 또한, 한여름 치열했던 나의 이민 시즌에서 더위를 식혀준, 진정 소나기 같은 보너스 시간이었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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