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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 오] 성실한 부모님 보며 봉사와 베푸는 삶 배워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5화> '한인사회의 대변인' 앤젤라 오 변호사
<9> 이민자 가정 장녀의 무게

 부모의 생일을 맞아 모인 앤젤라 오 변호사와 가족들. 왼쪽부터 조카 엘리스 루, 첫째 동생 크리스털·마셜 루 부부, 오 변호사 남편 밍 투, 어머니 오영숙씨와 아버지 오삼률씨, 남동생 데이비드·에이미 오 부부와 자녀 루크와 카미, 오 변호사, 둘째 동생 캐런오씨.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부모의 생일을 맞아 모인 앤젤라 오 변호사와 가족들. 왼쪽부터 조카 엘리스 루, 첫째 동생 크리스털·마셜 루 부부, 오 변호사 남편 밍 투, 어머니 오영숙씨와 아버지 오삼률씨, 남동생 데이비드·에이미 오 부부와 자녀 루크와 카미, 오 변호사, 둘째 동생 캐런오씨.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유학생 대접한 외할머니 통해
나누는 삶·봉사 정신 깨달아
학생 점수 매기는 교수직 포기
공통 관심 ‘선’ 통해 남편 만나


엄마는 지금도 매일 하나님께 기도한다. 4명의 자녀와 7명의 손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주말마다 찾아가 뵙는 아버지는 늘 행복하게 웃으며 “나의 앤젤라! 어서 와”라고 말하며 맞는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벌써 90세가 됐다. 날이 갈수록 어린이처럼 변해가는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매일 잔소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챙긴다.

▶평범한 어린 시절

나는 1남 3녀 중 맏이다. 이민 가정의 삶의 무게를 나눠서 지는 맏딸이었다. 아버지(오삼률·91)는 시 정부 기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오영숙·78)는 한인타운에서 개인 사립학교를 운영하다 나중에 샌퍼낸도 밸리에 있는 매그닛스쿨에서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모든 맞벌이 가정이 그렇듯 나는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했다.

이민자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 삶은 항상 할 일과 책임이 많았다.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이민자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 삶은 항상 할 일과 책임이 많았다.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밥을 차리는 건 기본이었다. 3살(크리스털), 9살(캐런), 13살(데이비드) 터울의 세 동생의 끼니를 챙기고 숙제를 챙겼다. 저녁에 퇴근하는 부모님을 위해 저녁도 만들어놔야 했고 빨래도 해야 했다. 토요일에는 동생들과 함께 대청소를 했지만 대부분은 내 몫이었다. 운전면허증을 받은 날부터는 동생들의 학교 픽업을 도맡았다. 정말 쉴 틈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큰언니’, ‘큰누나’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맡았던 역할은 고스란히 둘째에게 넘어 갔다. 당시에는 그렇게 지내는 게 당연하고 또 그게 자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자녀가 없는 결혼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게 어릴 때 동생들을 돌보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체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외할머니 통해 봉사의 기쁨 배워

부모님은 매일 성실하게 사셨다. 주중에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종일 지내셨다. 장로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노래를 잘하셨는데 성가대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웃과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녀들도 잘 키웠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변호사가 됐고, 둘째는 의사 남편을 만나 잘 살고 있다. 세째는 의사가 됐고 막내는 사업가로 크게 성공해 포틀랜드에 살고 있다. 자녀 모두 결혼해서 손자·손녀가 7명이나 생겼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이민자의 삶이다.

동생들이 어릴 때 외할머니가 미국을 방문했다. 제퍼슨과 익스포지션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4~5년을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당시 교회에 유학생들이 오면 항상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늘 방문자들로 집이 북적였는데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해 먹이는 걸 좋아한다.

내가 지금까지도 커뮤니티를 위해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하고 그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도 그때 보고 배운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일이 많고 힘들다고 했지만 할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렸다. 누군가에게 베풀기 위해 함께 일하고 가진 걸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나는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에서 늘 볼 수 있었다.

▶돈·명예 대신 선택한 커뮤니티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어릴 때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았고, 커서는 “하지 말라”는 한인 커뮤니티의 일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교회는 늘 학교 활동이나 공부 등을 이유로 빠졌다. 시작은 친할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에서부터다.

목회자였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재혼해 동부로 떠난 게 어린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남가주에 한인 거주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교회에는 소문이 다 났고 나는 솔직히 창피했다. 교회에 가기 싫어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계속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부에 정착한 할아버지가 의대에 진학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동부에 가서 장례식을 도맡아 치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미웠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커뮤니티 관련 일을 하러 다녔다.사람들은 내게 리더의 역할을 끊임없이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앞장서서 그룹을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갈 수 있게 앞에 있는 나무를 자르고 먹을 수 있게 밥을 지어주는 역할이 좋았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돈도 생기지 않고 욕만 먹는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속상해 했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실이 그때만큼 감사한 적이 없었다.

▶나무 베고 쌀 씻는 게 내 역할

형사법 변호사의 길을 떠나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여기저기 생겼다. UCLA에서 나는 인종과 미국법, 21세기 리더십을 가르쳤다. 이때 지금의 남편도 만났다. 중국계 예술가인 그는 당시 UCLA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 우리는 ‘선(Zen)’에 대해 얘기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외부에서는 ‘교수’의 삶이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에 남아 가르치는 역할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학생들과 만나 대화하고 가르치는 것은 좋았지만 그들의 제출한 숙제를 읽고 분석해 점수를 매기는 게 그중 가장 어려웠다. 학생 개인의 재능을 존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냥 강사나 펠로의 역할이 내겐 더 쉽고 어울렸다.

내게 선을 처음 가르친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고. 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고기만 있고 다른 먹을 것이 없다면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의 답을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갇혀있던 나 자신에게서 풀려나 자유로움을 느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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