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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여백에 쓰는 문장

전자책의 여러 가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을 집어 드는 사람들은 종이책이 갖는 여백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책이라는 도구가 주는 기계라는 선입견이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가져오고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기계적으로 맞추어 읽어내야 한다는 그런 쫓기는 기분이 된다. 빈틈없이 짜인 틀 속에서 길을 찾아가야 하는 듯한 기분도 따라온다. 실제로도 전자책은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쉽게 적어 놓을 공간이 없다. 종이책에는 내 생각 적어넣을 공간이 아주 많다. 읽다가 잠시 접어놓아도 그다지 부담이 없다. 어느 때고 다시 집어 들고 책장을 펼치면 그 자리에서 반가운 문장이 기다리고 있다. 종이책을 대하는 것은 여유 있게 작가의 말을 따라 흥미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넉넉한 행위에 속한다. 종이책은 이런 여백을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고 싶은 바쁜 생활 속에 자리 잡는 또 하나 여유의 생활이 된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한 가지 일에만 열심히 하다 퇴직하게 되면 그때 만나는 일 없는 빈 시간으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음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퇴직 후 시간을 보낼 취미나 여가 활동을 가져야 한다고 권하는 말이 많다. 특별히 허락된 귀중한 시간을 그저 보내기에 급급한 시간을 죽이는 행위로 연명하라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충고다. 살면서 여러 가지를 엮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하나의 역할을 잘 끝내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 그것에 자기의 힘과 능력을 알맞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그 일이 크든 작든 어떠한 일이든 상관없다. 여백을 귀중하게 쓰는 일이다. 생활 속에 여백을 두고 그곳을 또 다른 주어로 채워가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이다.

많은 작가의 육필 원고를 보면 가운데 원래 썼던 문장이 자리 잡고 나중에 추가로 써넣은 문장들이 원고지 여백에 빈틈없이 제멋대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의 문장을 넘어 그 여백에 들어찬 문장들이 작가의 글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고지에 여백이 없었으면 어떻게 그 놀라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글쓰기의 묘미가 마구잡이로 낙서해 놓은 것 같은 예전 작가들의 육필 원고에서 그러나 보기 좋게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지금보다 불편하고 궁핍했던 그때 시절의 작가들에게서 넉넉한 마음 씀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여 그리워지는 마음이다. 여백을 자꾸 없애버리는 듯한 현대생활이 여백을 더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음속 여백이 없어 인생을 쫓기듯 그렸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인생을 쫓기듯 살기는 싫은 마음이 만드는 인생을 이끄는 여백의 힘을 바라본다.

지금은 처음 겪는 질병에 의한 생활 형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때이다. 그래서 생각지 못한 생활 속의 여백에 강제로 맞닥뜨리고 있다. 듣기 좋게 여백이라 표현하지만 실상 어떤 공백에 가까운 형편에 속한다.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공백이든 여백이든 어떻게 말하던지 그것은 우리 생활 속에 느닷없이 생겨난 하얀 공간이다. 마치 원고지 둘레로 자리 잡은 하얀 여백이 문득 많이 늘어나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있는 듯하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직장을 놓고 준비 없이 맞은 빈 하루를 보는 듯하다. 지혜라는 것이 필요한 지점에 서 있음이다. 여백을 잘 활용하여 그곳에 좋은 문장을 채워서 전체의 글을 훌륭하게 만드는 솜씨가 기다려진다.




안성남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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