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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잊지 말아야 할 6·25의 교훈

6·25전쟁 71주년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벽을 때렸다.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곧 바로 유엔에 호소하고 군대를 파병해 한국을 도왔다. 1129일 치러진 전쟁 동안 미국은 연인원 180만여명을 파병해 전사자 3만7000여명, 부상자 9만2000여명, 실종자 3700여명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당하면서도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

그해 7월 초, 미 제24사단의 스미스 대대가 최초로 북한군과 조우했던 오산 죽미령 전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던 미군 24사단 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로 잡혔던 대전 전투, 8월 하순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다부동 전투, 9월 15일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9월 28일 서울 탈환, 10월 1일 육군 제3사단의 38선 돌파, 10월 19일 평양 점령, 1950년 11월 하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벌어진 청천강 전투, 혹한의 추위 속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한 장진호 전투, 12월 중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나선 10만여명의 피란민을 남쪽으로 후송시킨 흥남 철수작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치러진 펀치볼 전투, 저격능선·김일성고지·백마고지·철의 삼각지 전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격전이 삼천리 강산을 피로 물들였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피맺힌 6·25전사의 한 토막이다.

중공군은 궤멸 직전의 북한군을 돕기 위해 인해전술로 1950년 11월 25일부터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미 육군 레인저 부대의 중대장으로 활약한 랄프 퍼켓 중위는 청천강 북쪽의 요충지인 205고지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중공군을 맞아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고지를 사수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퍼켓 대령의 무공을 소개하면서 “평화의 시대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술회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한국은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 오늘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언젠부터인가 위정자들은 공식 석상에서 6·25 남침과 천안함 폭침을 ‘북한 소행’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북의 폭침 주범을 불러 국빈급 대우를 했고 천안함을 우발적 사고라고 했던 좌파인사가 장관직에 앉았다. 국방장관조차도 북한 도발을 “불미스러운 충돌” 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북한이라는 명백한 적이 있다. 핵무장 등 중무장을 한 120만 군을 보유한 주적이다. 북한은 수많은 도발을 자행하면서 핵이란 최후 무력수단에 목을 매고 있다. 특히 북에 한없이 착한 남쪽의 정권은 국방 백서에서 북한은 적이라는 표현을 빼 버렸고 북한을 의식해 한미연합훈련도 안 한다. 눈앞에 적을 보면서 훈련 안 하는 군대에 기강이 있을 리 없다. 평화는 평화로 이뤄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체제로 건국해 공산주의 전제 체제에 맞서 나라를 지켰다. 비록 한때 정권이 자유를 제한했지만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정치적 민주화를 완성해 지금은 선진국의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6·25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오늘 대한민국에게 주는 엄숙한 경고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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